<시쓰는 물류인>
천가(千家) 박가(朴家)
글. 천동암 삼성전자로지텍 부장
새벽 5시경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새벽에 무슨 전화일까?’
나는 물류업무 특성상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전화를 받은 것이 몸에 배여 있다. 물류업무는 24시간 운영되어 누군가 새벽에 전화를 거는 경우는 창고나 운송 중 사고가 발생하여 순간적으로 의사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서재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어머니였다. ‘이 시간에 어머니가 왜 전화를!’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어머니와 나는 새벽에 전화를 걸 정도로 살가운 정이 없다. 더구나 1년에 두 번 정도 형식적인 외가(外家)방문을 하고 외가에 가는 것도 어머니 보다는 외할머니 때문이다. “동암아! 방금 할머니 천국 가셨다.” 어머니는 짧게 내용을 알려주고 장례식장 관련해서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지난주에 외가에 갔을 때도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운명하셨구나.’ 순간 마음에 파란 구멍이 생기며 창밖에 어슴푸레 들이마신 찬 새벽공기가 시리게 다가왔다.
내가 세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분이 외할머니였다. 부모님이 이혼 후, 나는 절로 보내졌다. 할머니는 겨우 23살인 딸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나를 절에 보내기로 결정을 한 것 같았다. 외할머니 얘기로는 절에 보내기 전날 밤에 세 살 배기인 나는 할머니 품에 얼굴을 깊숙이 묻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꼭 잡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추위에 입술이 파랗게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마치 짐승 새끼가 어미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때 처절했던 기억이 가슴에 주홍글씨로 남아 평생을 괴로워했었다.
외할머니 부고 소식을 듣고 이복(異腹)동생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 할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표면적으로 외할머니와 두 명의 이복동생들에게는 혈육관계로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다가 동생들에게 외할머니 부고 소식을 알렸다. 밤 11시경에 두 명의 동생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어머니는 이혼 후 박가(朴家)성을 갖은 분과 재혼하고 아들과 딸,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천가(千家) 그리고 박가(朴家) 동생들이 처음으로 만났다.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잔잔한 미풍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내 존재가 생부와 생모 사이에 이들 동생들이 만나게 해주는 오작교(烏鵲橋)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성씨(姓氏)는 다르지만 나는 이들 동생들의 큰 형이고 비록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동생들에게 성씨를 따지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고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성씨가 다른 형제들에게 파생된 나의 의무감, 부모님 이혼에 따른 광야 같았던 나의 삶, 부모님들(아버지와 새어머니, 어머니와 새아버지)에 대한 경제적인 짐, 이 모든 것은 부모님들이 나에게 남겨진 십자가, 떨쳐 버리려 해도 젖은 낙엽처럼 바싹 달라붙은 주홍글씨처럼 항상 내 가슴에 그려져 있었다. 이것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붉은 십자가 같은 주홍 글씨는 불에 달군 쇠줄이 되어 내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때로는 힘이 부치고 힘들어 했지만 부모님들이 만든 십자가지만 거부 할 수 없다면 나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감사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조문객은 없었다. 외할머니 영정 앞에 이들 동생들을 모이게 했다. 동생들을 할머니 영정 앞에 세워두고 나는 할머니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여기에 성씨가 다른 동생들이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할머니 때문이죠. 고맙습니다. 동생들 앞에서 다시 말 할게요. 저를 절로 보내고 버리신 것 다 용서합니다. 가슴 속에 남았던 할머니의 주홍글씨를 제 눈물로 지워 드릴게요. 이제 질곡의 삶을 내려놓고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할머니! 사랑합니다.” 서운함도 뼈아픔도 여명이 오는 아침에는 찰나인 것처럼 가슴 속에 울분으로 쌓였던 감정이 치솟아 할머니 영정에 머물다 이내 가라앉고 있었다.
천가(千家)동생들이 가고 장례식장에는 박가(朴家) 동생들과 누나와 내가 남았다. 누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써가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 것을 보니 술이 취해 있었다. “박가 동생들, 내 말 좀 들어 보소. 내가 15살에 어무이 보고잡아서 무작정 서울와서 식모살이 하다가 연락되야서 엄마를 봤는디 엄니가 뭐라 했는지 아냐 잉? 근께,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서야,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껭. 창피하다고 잉, 이게 말이 되아브냐! 그 때 나는 엄니 말이 가슴에 사무쳐야, 정말 사무쳐야!” 술기운에 누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면서 두 눈에는 붉은색 물빛이 번지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박가 동생들, 내 말도 좀 들어 보소. 내가 17살에 서울에 와서 공장 생활 할 때, 기숙사 위생이 엉망이어서 등창을 심하게 앓았다. 그래서 마포에서 슈퍼가게 운영하는 엄마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엄마의 첫마디가 바빠 죽겠는데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는지 그것부터 따지더라. 공장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 갑자기 죽고 싶더라. 등창 부위에는 상처가 도드라져 냄새 나고 잠도 못자고 해서 엄마랑 병원 가고 싶어서 갔는데….”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술김에 엉엉 울었다. 불에 달군 주홍 글씨 쇠줄이 악(惡)감정에 사무친 내 마음을 채찍질 해 버렸다.
누나는 마음을 다시 진정하고 나와 박가 동생들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얘기를 했다. “동암아! 동생들이 뭔 잘못이 있건냐! 다 지난 일 아니것냐?” 동생들이 누나와 내 말을 듣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큰 동생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사죄하는 어조로 넌지시 얘기를 했다. “누나, 형, 마음고생이 정말 많았군요. 근데, 엄마 성격이 다정다감하지는 않아요. 저희들에게도 혹독하게 한 적이 많아요.” 누나와 나 그리고 박가 동생들이 어머니 흉을 보면서 시나브로 서로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동생들에게 진솔한 말을 토해내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장례식장에서 잠시 나와서 하늘에 있는 떠 있는 별들과 달을 쳐다보았다. 보름달 주위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저마다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천가(千家), 박가(朴家) 동생들 그리고 누나와 내가 그 별들과 달이 아닐까?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빛깔도 다른 부조화(不調和)지만 땅을 향해 한 방향으로 내 뿜은 빛처럼 ‘피’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조화(調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부모이든 아니면 한쪽 부모의 피를 받았던 상관없이 혈육(血肉)이라는 것은 태생부터 부조화(不調和)이고 ‘피’는 서로 끄는 힘이 있기에 조화(調和)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새벽 달빛과 별빛들이 화음을 내며 내 귀를 적시고 내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싸륵싸륵 덮어주고 있었다.
시와 소설을 쓰는 물류인 천동암 박사는 한국코카콜라와, 삼성전자, 한화큐셀에서 근무했던 물류 전문가입니다. 2010년 계간 한국작가에 등단(시)하여 시집으로 <오른다리>, <천가박가> 소설은 <아버지의 유산>, <물류 부장 오달수의 하루-일본편>을 출간 했다. 경영학 박사학위와 국제자격증인 CPL, CPIM 및 CPSM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문서적으로는 국제물류론, 창고하역론을 집필했다. 물류와 문학을 융합시켜 4차 산업혁명 속에서도 인간이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경동대학교(경기도 양주 캠퍼스)에서 물류와 SCM 및 물류정보시스템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