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상영되기까지, ‘투자-배급-상영’의 연결고리상영관 구하기조차 어렵다는 독립영화판, 플랫폼으로 길 열릴까
글. 엄지용 기자
몇 달 전 친구 소개로 영화산업 관계자 한 분과 술자리를 가진 적 있습니다. 영화산업에서 소외된 감독과 스태프, 특히 독립영화 제작자가 만드는 영화의 상영과 배급을 지원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죠. 어찌어찌 술자리가 깊어졌고, 술자리의 화두는 자연스레 ‘영화업계’로 흘러갔습니다.
“지금 영화업계는 C사, L사 같은 몇몇 대기업이 다 해먹는 구조야. 독립영화는 상영관조차 얻기 어려워. 운 좋게 상영을 하더라도 손익분기점을 못 넘기면 감독에게는 돈 한 푼 들어오지 않아.”
영화산업에 대해 잘 모르는 저는 그저 열심히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들으면서, ‘이 동네도 대기업이 만든 생태계 때문에 울분이 많이 쌓였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왜 독립영화는 상영관조차 얻기 어려운 것일까?’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 <님포매니악>이라는 영화를 보려했던 적 있습니다. 하지만 인천에는 ‘영화공간주안’이라는 곳을 제외하고는 해당 영화를 상영하지 않더군요. 결국 아쉽게도 저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느 술자리처럼, 화제는 영화에서 또 다른 무언가로 휙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제 의문은 풀리지 못한 채로 남게 되었죠. 그 술자리가 있고 얼마 뒤, 다시 그 분과 술자리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요전번에 만난 그분뿐 아니라 영화감독 한 분도 함께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영화감독과 술자리를 하게 되다니요. 흥분한 저는 그 자리에 있던 관계자에게 무슨 영화를 찍은 분이시냐고 물어봤습니다. <나가요>라는 영화를 찍었다고 답하더군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었지만 바로 이어 들은 줄거리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한 20대 가수지망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하필 유흥업소였고,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진다.’ 줄거리는 이러했습니다. <나가요>라는 제목은 유흥업소 출입여성을 칭하는 은어인 ‘나가요 언니’를 의미하는 동시에, ‘긴 밤(나가이 요루, 長い夜)’을 뜻하기도 한다더군요.
▲ 그 날, 생애 처음 감독을 만났다. 느낌이 묘했다.(출처: 네이버 검색 캡처)
호기심이 생긴 저는 바로 되물었습니다. “그거 재밌겠네. 혹시 볼 수 있는 곳이 있나?” IPTV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한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애써 찍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한 곳도 없다니, 의아했습니다. 왜일까요? 영화산업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영화도 돈 있어야 찍는다
영화산업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바닥을 구성하는 플레이어들을 알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먼저 투자사입니다.
최근 독립영화제는 다큐멘터리 영화 천지라고 합니다. 지난해 12월, 독립영화를 꽤 좋아하는 친구 하나는 서울독립영화제에 다녀오더니 “무슨 영화제가 이렇게 다큐 일색이냐”고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영화제에 다큐멘터리가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돈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 2016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 지난해 이 영화제의 대상은 이동우 감독의 <노후대책없다>가 수상했다. 매우 화가 나 있는 펑크밴드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필자도 기회가 돼서 FOFF 2017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참 재밌었다.
독립영화를 찍는 데도 돈이 많이 드느냐고요?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화만을 대상으로 열리는 영화공모전도 있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독립영화라 하더라도 개인이 부담하기엔 꽤나 큰돈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꽤 성공한 독립영화로 꼽히는 진모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는 1억 2,000만 원의 제작비가 들었습니다. 일반인이 혼자 마련하기에는 꽤 큰 액수이죠.
다큐멘터리에 드는 돈이 이 정도인데, 슈퍼스타가 등장하고 CG 등의 화려한 특수효과로 점철된 소위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떨까요? 작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닥터스트레인지>의 제작비는 1억 6,500만 달러(약 1,865억 원)였고, 천만 관객을 돌파해 지난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부산행>의 제작비는 115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좀 잘나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혹은 상영관에 좀 걸렸다 싶은 한국영화의 제작비는 대부분 100억 원대를 상회합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의 손익분기점은 관객 수를 기준으로 수백만 명 이상입니다. 한편 앞서 언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손익분기점은 10만 명이었습니다. 숫자의 단위가 휙휙 달라집니다.
결국 영화도 돈이 있어야 찍습니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 ‘투자사’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까닭입니다. 투자사의 목표는 투자한 돈 이상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투자사는 영화를 만들었던 레퍼런스가 없거나 부족한 독립영화 감독에게는 큰돈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립영화의 작법은 그나마 돈이 덜 드는 다큐멘터리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큐멘터리는 조명, 시나리오, 카메라 감독 등의 스태프 없이 혼자 만들기가 비교적 용이합니다. 독립영화판에 다큐멘터리 장르 영화 쏠림 현상이 발생함과 동시에 1인 제작 시스템이 자리매김한 까닭입니다.
송기란 인하대 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는 “약 10년 전 영화산업이 호황일 때는 시나리오만으로 투자를 받는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배우 캐스팅까지 어느 정도 끝나야 투자가 붙는다”며 “투자를 받기 어려운 독립영화는 크라우드펀딩 등을 통해 투자유치를 하고 있지만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다(최근에 가장 성공한 사례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꼽힙니다.)”고 말했습니다.
배급사의 힘, 그리고 수직 大통합
영화관에서 광고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올라오는 검은 화면을 유심히 보신 적 있으신지요? 거기에 어떤 글씨가 쓰여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혹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잘 기억나지 않으시다고요? 하지만 통통거리는 아이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과, 이와 함께 터지는 CJ로고, 그리고 노란 박스에서 튀어나오는 ‘쇼박스’라는 걸쭉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분은 꽤 있겠지요?
이들이 바로 ‘배급사’입니다. 영화 시작 전의 검은 화면에서 이들은 대개 ‘제공/배급’ 담당으로 언급됩니다. 배급사는 쉽게 말해 영화의 유통을 담당하는 회사입니다. 영화의 유통이란 곧 ‘잘 팔릴 영화를 많은 스크린에 거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배급과 함께 잠깐 언급되는 ‘제공’은 무엇일까요? 제공은 투자와 비슷한 말로 쓰입니다. 보통 한 영화에 하나의 투자사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므로, ‘공동제공’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투자자가 함께 언급되는 것이지요.(투자, 공동투자가 혼용되기도 합니다.)
‘제공/배급’이 하나로 묶여 함께 언급되는 것은 하나의 회사가 투자와 배급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국내 4대 영화 배급사는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넥스트(NEW), 롯데엔터테인먼트로서, 이들은 투자까지 함께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셨나요? 눈치가 빠른 분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배급사의 역할은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국내 스크린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3대 영화 상영관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입니다. CJ엔터테인먼트와 CGV, 롯데엔터테인먼트와 롯데시네마의 ‘연결고리’가 보이시나요? 실제 CJ와 롯데는 투자, 배급, 상영을 수직적으로 통합했으며, 특히 CJ E&M은 지난해 11월 영화 제작사인 JK필름과 M&A를 체결함으로써 투자, 제작, 배급, 상영을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송 교수는 “투자, 배급, 상영을 한 그룹사가 다 맡아 하면 그룹사가 투자한 영화를 그룹사가 보유한 상영관에 다 깔아서 스크린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가능해진다”며 “이렇게 되면 상영관, 배급사, 투자사, 제작사 순으로 매출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돈을 잃는 게 쉽지가 않다”고 밝혔습니다.
▲ CGV 청담시네시티. 건물 옆에 간판들을 잘 보시라. ‘뚜레주르’가 보이고, ‘투썸플레이스’가 보이고, ‘빕스’가 보이고, ‘비비고’가 보인다. ‘엠넷’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브랜드를 모두 소유한 회사는 말 안 해도 어딘지 알 거라 생각한다. 궁금하면 찾아보시라.
게다가 상영관은 영화 티켓으로만 돈을 버는 게 아닙니다. 팝콘도 팔고, 콜라도 팔고, 광고도 팝니다. CGV가 자리 잡고 있는 건물에는 왜 이렇게 많은 투썸플레이스가 있는 것일까요? 또 롯데시네마는 왜 항상 롯데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걸까요? 아, 롯데하면 엔제리너스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이게 다 돈입니다, 돈.
죽느냐 사느냐, 자본에 달려있다
결국 문제는 돈입니다. 그렇다면 영화산업에서 매출의 분배는 어떻게 이뤄질까요? 맨 먼저 상영관에 가장 높은 비율이 분배됩니다. 이후 배급사, 투자사를 거쳐 마지막 남은 매출이 제작사에게 떨어집니다. 지난해 8월 쇼박스가 공개한 IR(Investor Relations) 자료에 따르면, 극장에서 티켓 판매를 통해 올린 매출은 극장사업자(50%)와 배급사업자(50%)에게 최초 분배됩니다. 이후 배급사업자가 약 10%의 배급수수료를 우선 공제 취득한 후, 나머지를 메인 투자사(제공사)에 지급합니다. 메인투자사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공동투자사(60%, 지분율에 따라 분배)와 제작사(40%)에 분배합니다.
▲ 영화산업의 비즈니스 구조(출처: 쇼박스)
얼핏 보면 불공정해보일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영관과 투자사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상영관은 극장을 짓고 운영하는 주체입니다. 가장 큰 인프라에 투자했다고 할 수 있지요. 투자사 역시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발생하는 피해를 100% 책임져야 합니다. 이에 비해 제작사는 프로젝트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특별한 책임을 부담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독립영화로 돌아와 볼까요? 블록버스터 영화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관객의 눈이 높아진 상황에서, 독립영화 제작사가 배급사를 찾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1,865억 원을 들여 만든 <닥터스트레인지>와 115억 원을 들여 만든 <부산행>, 그리고 1억 2,000만원을 들여 만든 <님아, 그강을 건너지 마오>의 티켓값은 모두 1만 원으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여야 하는 상영관은 어떤 영화에 더 많은 스크린을 할당할까요? 그리고 많은 상영관을 잡아야 하는 배급사는 어떤 영화를 끌어올까요? 독립영화가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화판이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 교수는 “영화산업에는 ‘감독’, ‘배우’, ‘광고/마케팅 예산’, ‘시리즈물’, ‘수상내역’ 등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흥행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법칙이 대부분 자본과 연결되는 상황에서 자본이 부족한 독립영화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즉, 잘 팔릴 영화를 가지고 와서 스크린에 거는 것은 자본주의의 눈에는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대중의 취향이 자본의 흐름에 길들여져 획일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영화들이 ‘흥행의 법칙’에 입각해 만들어집니다. 그 법칙만 잘 따르면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몇 가지 법칙에 짜 맞춰진 영화가 양산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서서히 길들여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해 박스오피스 흥행작을 떠올려봅시다. 익숙한 배우의 이름이 많이 보입니다. 흥행 1위 <부산행>에는 ‘공유’가 있고, 2위 <검사외전>에는 ‘강동원’이 있습니다. 3위 <캡틴아메리카: 시빌워>는 논외로 두고, 4위 <밀정>에는 ‘송강호’와 다시 ‘공유’가 있네요. 5위 <터널>에는 ‘하정우’가 있고요.
또 누군가는 “한국 영화는 맨날 ‘신파’뿐”이라며 구시렁댑니다. 한국 영화에 신파가 속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파가 흥행의 법칙이 되었거든요. ‘애국심 자극’이 흥행의 법칙으로 떠오르던 때도 있었습니다. 2014년의 <명량>, 2015년의 <암살>, 2016년의 <인천상륙작전>이 모두 그 법칙의 자장 안에 있습니다.
플랫폼이 독립영화 구세주될까
그러면 자본의 힘에 짓눌린 독립영화는 결국 한국 영화판에서 사라지게 될까요?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재밌는 사례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에서 이번달 개봉 예정인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입니다. 이 영화는 극장 개봉과 동시에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됩니다. 그 이유는 물론 <옥자>가 넷플릭스의 투자로 만들어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옥자>의 넷플릭스 동시 공개가 영화 유통계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됩니다.
송 교수는 “<옥자>는 한국에선 블록버스터로 소구될 영화지만, 세계에서는 ‘니치’ 마켓을 보고 공략해야 하는 마니아 영화”라며 “잘 팔릴 수 있는 시장에는 큰돈을 투자하고, 니치 시장은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 채널을 통해 공략하는 식으로 감독의 배급 채널 선택권이 늘어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그는 또한 “극장은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채널의 자리를 유지하겠지만, 플랫폼으로 배급되는 영화가 점점 늘어나면 그 시장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더 이상 독립영화가 메이저 시장에 들어와서 경쟁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전 세계 어딘가에 있을 마이너한 취향의 팬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배급망을 찾는 게 독립영화가 살 길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실 저는 몇 달 전부터 VOD(Video on Demand) 스트리밍 서비스인 ‘왓챠플레이’를 정기구독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왓챠플레이에 얼마 전부터 몇십 분짜리 짧은 영상들이 올라오더랍니다. 바로 독립 단편영화들이었죠. 몇 달 전 한 영화제의 홍보이사를 맡고 있던 친구가 내부자만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조심스레 보여줬던 단편 독립영화 <한양빌라, 401호> 역시 왓챠플레이를 통해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습니다.
▲ 왓챠플레이 ‘새로 올라온 작품’ 목록에 업데이트된 단편독립영화들
극장이 지배하던 영화 유통 생태계, 플랫폼이 활로를 뚫어줄 수 있을까요? 인디 콘텐츠를 참 좋아하는 저로서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가요>와 같은 영화를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로 볼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