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공급망, 전장(戰場)의 SCM①
한국 경제의 버팀목 '제조업', 왜 종말론을 바라보는가
인건비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생산성', 지가 상승은 덤으로
리엔지니어링, ERP, SCM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수요 중심의 더 유연한 조직으로
글. 설창민 SCM 칼럼니스트
메이드인코리아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의 황금기를 지나고, 거대한 암운이 제조업의 하늘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껏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했던 핵심 업종들의 쇠락을 이렇게 바라만 볼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든 대응하고 변해야 한다. 귀에 딱지 앉도록 들은 이야기겠지만 결국은 ‘온디맨드’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종말을 고하고 있는 요즘이다.
2000년대는 한국제품의 전성기였다. 유럽 사람들은 중국산 제품이 끝마무리가 안 좋다는 이유로 ‘메이드인코리아’가 찍힌 노키아 휴대폰을 애용했다. 2000년대 후반 우리가 만든 피처폰은 세계시장 1, 2위를 다투었다. 그 중심에는 삼성전자 구미공장과 LG전자 평택공장이 있었다.
2010년대 초반, 한국GM은 유럽향 CKD(Completely Knocked Down) 수출의 전진기지였고, GM 소형차 전략의 중심이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기업들은 앞 다투어 국내 투자를 늘렸고, 조선소들은 몇 년치 일감을 쌓아 놓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현대차는 세계 5위 자동차 회사가 되었고, 토요타를 넘보게 되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선진국의 견제와 중국의 추격이 무섭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경쟁력과 저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은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바뀌었다. 노키아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면서 2014년 마산공장을 완전히 정리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산공장을 인수할 것이라는 소식이 나온 뒤에 일어난 일이어서 충격은 더 컸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량 중 구미공장의 비중은 10% 미만이며, 베트남 수출의 1/4이 삼성전자 휴대폰이다.
한국GM은 철수를 운운하고 있다. 2018년 4월 기준으로 철수하네 마네하고 있는데, 글로벌 기업이 한번 철수를 내뱉었다는 것은 철수를 늦출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철수할 거라고 보면 된다. 조선소들은 일감이 소진되어 하나둘 정리 수순을 밟고 있다. 현대차는 국내외에서 수입차와 중국산 자동차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정말 ‘인건비’ 때문일까?
경제와 사회가 선진화되면 사라지는 업종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해주던 업종에서 종말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냥 넘기기 힘들다. 왜 이렇게 됐을까. 많은 언론들의 보도처럼 ‘인건비가 엄청 많이 올라서’ 그런 것일까. 우리나라 주력산업이 ‘인형 눈 붙이기’나 ‘구슬 꿰기’ 같은 노동집약산업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주력산업은 자본집약 산업이다. 자동화설비와 대규모 공장을 필요로 한다. 자동화 설비와 대규모 공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은 생산능력과 효율을 높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공장을 확장하고 설비 투자를 해야 한다. 허나 요즘 우리나라의 대규모 설비투자를 계속하는 산업은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정도만 남았다.
우리기업들이 국내 설비투자에 인색한 것은 ‘인건비’ 영향도 있겠지만, 지가의 영향이 만만치 않다. 아파트값은 많이들 비싸다고 하는데, 기업이 공장을 지어야 할 땅값 상승에 대해서는 입들이 참 무거우시다. 오늘날 저출산을 이끈 근저에는 비싼 집값이 숨어있다. 집값이 비싸니 집을 구할 돈을 모으기 힘들어진다. 집이 없으니 결혼이 늦어지며, 출산을 안 한다.
기업이라고 사정이 다르랴. 부동산 가격 상승은 지가와 임대료 상승을 불러온다. 넓고 싸고 마음에 드는 공장부지에 대한 선택지가 줄어든다. 공장 설립시 투자비용이 상승하면 고정비가 부담이 되니 흔쾌히 투자할 수 없고, 투자하더라도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 임대료 상승은 경비 상승으로 이어져 제품 원가에 반영되고, 제품 원가는 상승한다. 그 제품을 구매하기 위한 구매력이 있어야 시장이 유지되니 인건비는 오른다. 인건비 상승은 제품 원가에 반영된다. 악순환이다.
이즘 되면 우리나라 설비 투자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만 집중되고 있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두 사업은 고가의 설비투자 때문에 공장부지 땅값이나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일본식 생산 시스템의 대명사 JIT(Just in Time)가 태동한 이유 중 하나는 공장을 지을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장을 지을 땅이 부족한데 생산을 해야 하니 재고를 둘 공간을 둬서는 안됐다. 주문받은 만큼, 즉 필요한 양만큼만 생산하는 체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일본식 생산 시스템은 더 이상 공장을 지을 마땅한 땅이 없는 상황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리고 일본 제조업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 전성기를 누렸다.
여기저기 다 땅값이 올라서 더 이상 공장을 지을 마땅한 땅이 없는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도 어떻게든 제한된 공장 안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왔다. 30년 전 LG전자 창원공장의 세탁기 생산능력은 50만 대 수준이었다고 한다. 2008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공장 부지를 하나도 안 늘렸는데 50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드 인 코리아가 위기를 맞는 것은 이제는 그 힘마저도 빠져간다는 신호다. 인건비 상승을 따라잡을 만큼 ‘생산성 향상’을 만드는데 한계가 왔다는 뜻이다.
그래도 변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냉혹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조금씩 바꿀 수는 있어도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메이드인코리아를 포기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비싼 지가, 비싼 인건비 속에서도 변하고 개선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 살아남기 위한 방법도 유행이 있었다. 그 유행들은 과연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반만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수많은 유행을 향유하며 자랐을 젊은 세대들이 이 땅을 ‘지옥’이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더 이상 따라가기 너무 힘들 정도로 유행이 빨리 바뀌고, 그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도 생각해 보면 유행이라는 것을 많이 겪었다.
당장 과거 20여 년을 돌이켜 보자. ‘리엔지니어링’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프로세스 혁신의 시대가 도래하더니 국제화, 개방화의 시대를 맞아 ‘국제경영’이 유행처럼 번졌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지나면서 시스템 통합(SI, System Integration) 업체들이 많이 생겨난 것은 프로세스 혁신의 시대의 산물이고, 1993년 대우에서는 국제경영의 또 다른 말로 ‘세계경영’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전사적 자원관리라 불리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가 등장해서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기존 고객을 유지하는 것이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며 고객관계관리(CRM, Customer Relation Management)가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공급망관리(SCM)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한다.
어찌 보면 패션만큼이나 많은 유행이 지나갔지만, 이것들이 지향했던 것은 늘 같았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공급자 시장에서 수요자 시장으로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더 빨리 움직이는 조직, 더 유연하게 변화에 따라가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프로세스를 혁신한 것은 낮은 비용으로 더 신속하게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국제경영으로 공장과 판매사무소를 외국에 세운 것은 국내시장이 수요 중심의 시장으로 전환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리라. ERP 같은 회사의 기간 시스템을 뜯어고치게 된 것은 국제화된 조직 속에서 더 많은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제품으로 다양한 소비자의 욕구를 남보다 빨리 만족시키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벌써부터 독자 여러분의 귀에 딱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다시금 각성해야 한다. 이 말을 모르는 분이 없는 건 아는데 정작 그걸 해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을 넘어 ‘온디맨드’로
산업혁명 이후 20세기까지는 기업간 생산기술 격차가 존재했다. 눈으로 봐도 조악한 제품과 말끔한 제품이 있었고, 생산성은 시장 수요를 맞추기에 부족했다. 시장 수요를 맞추기도 어려운데 다양한 제품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시장은 공급자가 언제 얼마나 제품을 공급하느냐에 좌우됐고, 공급하는 제품의 다양성은 제한적이었다. 제품 하나가 회사 하나를 먹여 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생산기술 격차는 투자와 기술 혁신으로 점점 좁혀졌다. 눈으로는 조악한 제품과 말끔한 제품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생산성은 시장 수요를 맞추고도 남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생산성과 생산기술이 평준화되면서 개도국에서도 우수한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상품 기획력만 있으면 누구든 시장에 좋은 제품을 출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필이면 신자유주의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시장의 구매력에 제약이 걸렸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상품이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라면’이라는 제품 하나로 이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985년 12월 5일자 매일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국내 라면시장은 삼양, 농심, 한국야쿠르트, 청보 등 4개 업체가 70여 종의 라면을 내놓고 경쟁했다. 1999년의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라면의 종류가 약 120여 개를 넘었다. 2011년 중앙일보 기사를 보니 라면의 종류는 200여 개이며, 라면생산 업체는 ‘농심’, ‘삼양식품’, ‘한국야쿠르트’, ‘오뚜기(청보 라면산업 인수)’로 26년 전과 같은 수의 업체가 3배 가까운 라면으로 경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1년 이후 편의점 PB(Private Brand)상품이 나타난다. 기존 4개사가 다루지 못했던 시장의 틈새를 공략한다. 최근 편의점 PB상품은 기존 4개사의 라면 못지않게 매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2년 4월 10일 일본 아이치현에 있는 토요타 테크니컬 센터에서 토요타 아키오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팔릴 줄 알았다(つくりさえすれば売れる)” 대량의 리콜 사태와 급발진 등 품질 문제를 접하고 나서, 판매량이 떨어진 다음에야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지 못했음을 반성한 것이다. 당장 우리가 영위하는 사업을 지켜보자. 거래처의 변덕은 과거에 비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일을 똑바로 안 해서 그런 걸까? 이건 시장의 흐름이다.
아무튼 이렇게 시장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연해져야 한다. 다양한 제품을 빨리 개발해서 시장에 빨리 투입해야 한다. 그렇게 투입한 제품이 시장을 만족시키지 못해 재고가 쌓이면 안 되기 때문에 재고로 쌓이기 전에 제품을 빨리 팔아 치우는 것이 중요해진다. 제품을 빨리 팔아 치우기 위해서는 진짜 시장의 수요를 알아야만 한다. 진짜 시장의 수요는 최종 소비자에 대한 판매 실적을 갖고 있는 유통업체로부터 받아야 한다. 또한 한꺼번에 많이 생산하는 것을 지양하고, 조금씩 자주 생산하는 것도 중요해진다. 바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다품종 소량생산’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 상품이 수없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계속)
군 복무 전 우연히 하게 된 창고 알바를 계기로 물류에 입문, 아직 초심을 안 버리고 물류하고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해서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cscully)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실무 경험으로 물류업계 종사자들의 삶과 애환을 독특한 시각과 필체로 써내려가는 것이 삶의 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