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편의 구라까이(다섯 번째 이야기)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오카도처럼"
롯데 신동빈 회장의 "쿠팡처럼"
(이미지 출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지난 주말 대형마트에 갔을 때 일입니다. 주차장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매장으로 내려가는데, 두 아들이 먼저 뛰어가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위쪽으로 뛰어올라가는 장난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이들이 열심히 걷더라도 에스컬레이터 자체가 내려가기 때문에 제자리에 머물거나 오히려 뒤로 밀리게 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위로 올라가려면 정말 열심히 뛰어야 하는 것이죠. (매번 혼내긴 합니다만, 철부지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며 그냥 지켜보는 게 부모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을 ‘레드 퀸 효과(Red Queen Effect)’ 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 격인 ‘유리 거울을 통해서’라는 소설에서 유래했습니다. 내용 중에 앨리스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자리에 머무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이상한 나라의 여왕인 레드퀸은 앨리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곳에서 제자리에 머물려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해.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보다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한다.”
주변 환경 자체가 변하기 때문에 제자리에만 머물려고 해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경영학에서도 레드 퀸이란 말이 자주 인용되기도 합니다. 한 회사가 경쟁사의 가격 및 생산량 조정이나 신규 마케팅 등 외부적 자극에 빨리 대응하는 조직의 성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할 때 쓰이는데, 결국 경쟁을 통해 서로 발전하는 ‘공진화(co-evolution)’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최근 산업계 공진화 현상이 아주 활발한 곳이 바로 물류시장입니다.
‘뭐눈에 뭐밖에 안보인다고’ 물류를 취재하는 기자에게 직업병처럼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진화하는 유통-물류시장의 라스트마일(lastmile) 분야가 그렇습니다. 이 분야에 차별화된 경쟁력을 얻고자 사활을 건 온/오프라인 유통시장은 물론 택배 등 물류기업들, 그리고 IT기술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띄워 시장 틈새를 노리는 각종 생활교통물류 스타트업과 플랫폼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유통 진화와 물류 가치의 변화
국내 온/오프라인 유통업체들 중 물류에 가장 공들이고 있는 곳은 아마도 이마트 일 겁니다. 지금은 쿠팡의 로켓배송 이슈에 살짝 가려져 있지만, 국내 유통업체 중 가장 빠르게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용인 보정, 김포에 이어 서울, 수도권에 4~5개 전용물류센터 확보 계획)를 구축하고, 자체배송 시스템 준비에 들어선 곳이 바로 이마트입니다.
(사진: 이마트 온라인전용물류센터, 용인 보정)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회사는 영국의 온라인 유통기업인 오카도(ocado)의 물류를 참고해 진화하는 유통 방식과 물류에 대비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마트가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잠깐 오카도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오카도는 단 한 개의 매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2000년에 창업해 10여년 만에 영국 대형마트 1위인 테스코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신흥 유통기업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각 매장에서 직접 배송하는 기존 대형마트들과 달리 독자적인 물류센터를 가동해 유통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오카도는 유통회사라기 보다는 IT테크놀로지 회사 에 가깝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카도는 오프라인 점포가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카도가 전통적인 유통업체들과 경쟁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빠르고 정확한 배송’ 덕분입니다. 오카도의 경우 ‘고객의 주문에 맞춰 배달을 완료’하는 비율은 99%에 달합니다. 약 95%의 상품은 주문 다음날까지 고객의 주방에 배달된다. 비결은 오카도만의 기술에 있습니다.
실제로 오카도는 유통에 최첨단 기술을 덧입혔습니다. 총 350여명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기술 전문가(technical specialist)들이 ▲배달 경로 최적화 ▲차량 추적 ▲산업 자동화 ▲로봇 공학 등을 연구해 오카도의 물류센터인 CFC(Central Fulfilment Center)와 배송 과정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오카도에 영감을 얻은 이마트는 신세계닷컴(ssg.com, 일명 ‘쓱’)을 필두로 모든 유통채널의 사이트를 통합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오프라인 매장의 고객 트래픽을 집중하기 위한 ‘이마트타운’ 또한 오픈해 운영 중입니다.
홈플러스 도 오픈마켓 플랫폼의 대표 격인 지마켓과 11번가에 당일배송 을 무기로 입점했습니다. 여전히 자체 홈페이지가 메인이지만, 트래픽을 늘리기 위한 방책으로 온라인 유통업체와 협력을 시작한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사진 출처: 홈플러스)
쿠팡과 티켓몬스터 등 소셜커머스 업체 또한 당일배송을 위한 물류센터를 확장하고 있으며, 기존의 오픈마켓 업체들도 자체 물류 비중을 증가시키며 물류 서비스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더 이상 업계 새로운 뉴스가 아닙니다.
배달의 민족과 요기요 를 필두로 배달업체들의 온라인화를 이끌었던 스타트업들은 이제 배달을 넘어 라스트마일 영역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은 온라인으로, 온라인은 오프라인으로 그 사업 영역은 확장되었으며, 그 방법론적인 해결책의 선두에는 물류가 있는 것입니다. (이병휘 캘로그 디멘드 플래너, ‘물류의 시대, 공급망 재설계가 필요한 이유’ 중에서)
가격→속도→신선 등 진화하는 배달의 가치
“유통업계 치열한 배송 경쟁의 중심이 ‘가격’과 ‘속도’에서 ‘신선’으로 바뀌고 있다. 그동안 누가 더 싸게, 더 빨리 물건을 배송하느냐가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누가 더 많은 신선한 식품을 배송하느냐가 핵심이다.” (이데일리 2016.1.5. 배송 전쟁, ´더 싸게´ 대신 ´더 신선하게´ 내용 중 발췌)
쿠팡 로켓배송으로 점화된 온오프라인 유통업계 물류 경쟁은 이제 ‘가격’과 ‘속도’의 이슈를 넘어서 ‘신선’, ‘특수’, ‘이벤트’ 등 부가가치 창출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는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의 증가로 직접 마트에 가는 대신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생필품뿐만 아니라 채소나 우유, 치즈, 달걀 등 신선한 식품까지 집으로 배송받기를 원하는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도전에 숨은 공로자 ‘포장’과 ‘물류센터’
“배송경쟁은 시간 경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취급품목과 성별과 연령층에 따라 고객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 속도는 중요한 경쟁도구이긴 하지만 고객이 원하는 게 빠른 속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타트업을 위한 첫 단추는 아마도 시장 변화를 직시하는 것과 그에 맞는 패키징물류를 구현하고 서비스로 제공하는 일이다.” (이강대 연세대 패키징학과 교수, ‘배송 다음은 포장스타트업’ 중에서 발췌)
사실 배송 속도전에 숨은 공로자는 화물차량 등 배송 인프라 확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빠른 배송의 숨은 조력자는 물류센터입니다. 실제로 아마존은 배송서비스를 시간 단축으로 승부하기 위해서 기존 물류센터의 개념을 바꿨던 사례에서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에 도심지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물류센터의 공간은 더 작아져야 하고, 더 작아진 공간은 고객에게 더 가까이 위치해야 합니다. 거대한 자본력과 조직력을 가진 알리바바나 아마존과 같은 기업이 원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근접한 거리에서 서비스하는 것이 추세입니다. B2B 물동량을 취급하는 물류센터가 그들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현재 집중하는 것은 B2C를 위한 현지 적정공간과 배송 인프라가 더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국내 물류시장은 앞서 서로 비슷한 배달 경쟁을 놓고 온/오프라인 유통기업과 물류기업, 스타트업 등이 서로 투자와 마케팅을 강화하면서 다른 회사가 이에 자극받아 대응 투자를 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서로 ‘공진화(co-evolution)’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일부 학자는 레드 퀸 효과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발전을 가져오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학계에서도 연구 검토된 사례가 있는데요. 미국 템플대와 메릴랜드대 연구팀은 56개 미국 기업의 데이터를 토대로 레드 퀸 효과와 기업 성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했습니다. 그 연구 결과, 경쟁사의 가격 및 생산량 조정이나 신규 마케팅 등 외부적 자극에 빨리 대응하는 조직의 성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특정 기업이 대응하면 경쟁사의 추가 대응을 유발, 이로 인한 실적 하락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사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기업들의 실적 상향 추세는 여전히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쟁을 통해 서로 발전하는 ‘공진화’ 현상을 뒷받침한 연구 결과인 셈이죠.
연구팀의 분석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건수보다 속도가 경쟁사의 실적에 끼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 는 점입니다. ‘스피드 경영’을 통한 신속한 대처가 그만큼 유용한 결 과 를 가져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독자에게 여쭙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향해 속도를 내어 뛰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