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도현 국민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저는 스스로 무지막지한 남성우월주의자는 아니라고 믿으면서 살았습니다. 누나가 많은 집안에서 자랐고, 그 누나들의 목소리가 제법 컸기 때문에 남자라고 까불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까요. 대학에 가서는 겉멋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좀 읽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만 있는 중, 고,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는 여성문제에 대해 제법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지’ 따위의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었고요.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난 뒤, 그리고 딸을 낳고 기르면서 비로소 우리사회의 여성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문제에 대해 제가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문제의 한 원인인 경우도 있더군요.
그런데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타트업 세상에도 여성창업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할까요? 스타트업 생태계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이곳이 꽤 ‘쿨’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동네에서는 나이가 많다거나, 남자라거나, 이른바 그럴듯한 학력 또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크게 대접해주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존중받는 이들은 큰 비전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인 경우가 많지요.(그래서 저는 이 생태계가 좋습니다). 그러니 여성이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받는 경우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훌륭한 여성창업자를 많이 발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제대로 분석해보면 결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선, 여성창업자는 투자유치를 할 때 남성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마찬가지입니다. 투자뿐만이 아닙니다. 은행에서의 대출이나 신용보증과 같은 전반적인 자금조달 과정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불리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도출해낸 일관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현상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은 분분합니다. 전통적인 설명은 아무래도 여성창업자가 남성창업자에 비해 좀 덜 우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들의 학력수준, 직장경력, 그리고 성장에 대한 열망이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낮으니, 투자를 덜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지요. 이런 설명은 편리합니다. 대출이나 보증 등 자금조달에서 여성창업자의 성과가 안 좋은 것도 함께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관점은 여성창업자의 인적자본을 향상시키자는 주장으로 이어져서 정치적으로도 무난해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만약 똑같은 수준의 학력, 경력, 사업모델을 가진 남성창업자와 여성창업자가 있다면 이 둘의 투자유치 확률은 거의 같게 나타날까요?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들은 과거의 자료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거나 설문조사를 통해 수행하는 연구 방법을 못미덥게 여깁니다. 과거 자료에는 여성창업자의 샘플이 너무 적으며, 설문조사를 할 때 투자자들은 실제 자신이 가진 신념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처럼 ‘여겨지는’ 대답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최근 7~8년 사이, 연구자들은 ‘실험연구’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업계획에서 창업자의 성별만 바꾼 다음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선호를 분석하는 방식입니다. 응답자가 자신들의 신념과 달리 ‘착한’ 응답을 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컨조인트’ 분석이라는 좀 복잡한 기법을 사용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런 방식의 연구를 통해서도 여성창업자가 겪는 불리함은 확인됩니다. 여성창업자는 남성창업자와 똑같은 경험과 경력, 사업모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남성에 비해 투자받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우리나라에서 이런 실험을 해본 결과 ‘동성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 투자자는 뚜렷하게 남성창업자를 선호하더군요. 여성 투자자가 매우 적은 우리나라에서, 남성 투자자의 남성선호는 당연히 여성창업자의 투자유치를 가로막는 걸림돌일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경력이나 사업모델과 같은 객관적인 조건이 아닌, 다른 요인이 여성창업자를 제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상정하는 ‘이상적인’ 창업자가 남자라는 것이 그 요인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알게 모르게, 창업자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명문대학 이공계열 출신의, 실패라고는 모르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고, 밤늦게까지 일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 남성이 떠오르지는 않으시는지요? 학자들은 이런 전형적인 모습에 부합하는 사람일수록 투자를 받기 쉽다고 주장합니다. 투자자들뿐 아닙니다. 미디어,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조차 이런 ‘전형적인’ 창업자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한 학습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창업자들의 성공 사례가 많기 때문에 전형성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형성에 대한 믿음이 너무 크면, ‘배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성이거나, 나이가 많거나,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거나, 사업 영역과 상관없는 공부를 했거나, 외국인(특히 서구선진국 출신이 아닌)인 창업자는 사업을 전개하거나 투자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질성이 아주 높습니다. 소위 지도층 모임에 가면 거의 예외 없이 어두운 양복을 입은 50대 이상의 남성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부합니다. 스타트업계는 그에 비해 훨씬 밝습니다. 옷차림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나이든 이들은, 명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은, 그리고 특히 외국인의 비율은 높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쿨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만큼은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