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TM부터 자율주행차량까지... '기술로 자동화되는 세상'
- 만남과 양심이 있었던 '무인매장' 의미 되새겨야
글. 신준혁 기자
Idea in Brief
인공지능과 센서 기반의 자동결제 시스템을 자랑하는 무인매장 ‘아마존고’가 나타났다. 유통인지 IT인지 물류인지 헷갈리는 공룡의 새로운 도전에 ‘무인매장’을 찬미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높아진다. 근데 말이다. 사실 무인매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기술이 없었다 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사라져버린 ‘커피 자판기’도 무인이다. 지난해 미국의 무인매장 스타트업 ‘보데가’가 논란이 됐을 때, 미국 현지인들은 트위터에 “그래서 니들이 자판기랑 뭐가 다른데?”라면서 비판을 했었다. ‘디지털’로 가득 찬 세상, 아직까진 아날로그가 숨 쉬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 기술 발전에 따른 무인화 흐름도
무인화를 위한 ‘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도 무인점포는 있었다. 과거의 무인점포는 ‘양심점포’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됐다. 주인이 없는 점포에서 고객은 스스로 물건을 구입했고, 거스름돈을 가져갔다. 이 모든 과정은 ‘양심’에 맡겨졌다. 이런 무인점포는 대부분 인적이 드문 고속도로 외곽이나 여행지에 위치해 있었으며, 간단한 식음료가 비치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깊은 산자락 어딘가에는 ‘무인 산장’도 있다. 판매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아니다. 산행중인 나그네는 이 공간에 모여 앉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졌다. 그래서인지 무인점포나 산장은 사람이 오간 흔적으로 가득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낙서나 쪽지를 흔히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찾기 힘든 ‘아날로그’다.
무인매장의 시초, 자판기
미국자동판매협회(NAMA, National Automatic Merchandising Association)에 따르면 최초의 상업용 무인화 시스템은 자동판매기(자판기)다. 1880년대 퍼서블 에버릿(Percival Everitt)에 의해 동전을 집어넣는 형태의 상업 자판기가 도입됐다. 이 자판기는 기차역이나 우체국에 설치돼 편지봉투와 우표를 판매했다. 1908년 껌 회사를 설립한 토마스 애덤스는 뉴욕 지하철 플랫폼에 껌 자판기를 설치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자판기는 껌, 콜라 등 사람을 고용하여 판매하기에는 마진이 크지 않은 저렴한 제품군을 중심으로 1940년 들어 확산됐다. 본격적인 자판기의 호황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전쟁으로 인해 인건비, 임대료가 상승하자 전 세계적으로 자판기 설치가 증가했다.
이제는 자판기 대국이라 불리는 일본으로 가보자. 일본 자판기의 시초는 1904년 도입된 ‘우표 판매기’다. 출시 당시 이 자판기는 대중화되지는 못했는데, 1950년대에 들어 사각종이박스에 담긴 음료가 자판기로 판매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현대 자판기의 대명사 ‘믹스커피 자판기’가 탄생한 나라도 일본이다. 믹스커피 자판기는 1981년 일본에서 개발됐고, 전 세계에 보급됐다.
일본에서 자판기 사업이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높은 인건비와 부동산 가격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본은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도시 밀집현상’이 일어난 대표적인 국가이기도 했는데, 그 점도 자판기 확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Business Insider)에 따르면 최근 일본 자판기 호황 이유를 ‘값 비싼 노동력’, ‘도시화’, ‘안정된 치안’, ‘높은 현금결제 비율’, ‘로봇에 대한 낮은 거부감’ 등으로 정리했다.
월간자동판매기에 따르면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흐름을 겪었다. 국내자판기 보급의 효시는 1977년 당시 롯데산업이 일본 샤프사(社)로부터 믹스커피 자판기를 도입, 설치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뒤이어 캔과 병음료, 담배 등의 자판기 판매가 이뤄졌고, 1984년에는 동전과 화폐교환자판기가 도입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는 믹스커피 자판기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1990년대에 이르러 호황을 누렸다. 자판기 설치에 대한 고정비와 운영비가 낮았기 때문에 사무실, 유원지, 대학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설치됐고, 인기도 좋았다.
자판기라는 이름의 별은 지고
이제 자판기는 지는 별이 됐다. 일본자동판매시스템기계공업회에 따르면 음료자판기는 2005년 267만대로 고점을 찍고, 점차 감소하여 2016년에는 247만대가 됐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90년대 성황을 이뤘던 믹스커피 자판기는 이후 빠르게 사라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국내 식품자동판매기 영업자는 2003년 12만 개에서 2014년 4만 개, 2015년에는 3만 개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사라진 자판기의 자리는 유인매장인 ‘편의점’이 대체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지난달 발표에 따르면 국내 편의점 숫자는 4만 개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며, 신규 개점한 편의점 숫자도 6,324개에 달한다. 인구 1,300명 당 한 개의 편의점이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골목골목에 입지한 편의점에서 기존 자판기가 판매하는 것 이상의 식품과 자판기는 판매하지 못했던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자판기와 동일하게 ‘24시간’ 동안 말이다.
아니 뗀 아날로그
이제 아마존고를 필두로 무인매장이 고개를 들었다. 어찌 보면 과거의 자동판매기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이들은 ‘기술’이라는 무기를 업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세븐일레븐과 이마트24가 지난해부터 ‘무인 편의점’ 실험에 나섰다.
▲ '열정에기름붓기 무인서점'에 놓인 돈통과 방명록. 모든 계산은 양심에 맡겨진다.
이런 세상에 별다른 기술 하나 없이 ‘아날로그’로 무인매장을 운영한다고 나선 업체가 있다. 열정에기름붓기 무인서점은 페이스북을 통해 청춘의 꿈과 열정을 응원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화제가 된 ‘열정에기름붓기’가 만든 오프라인 서점이다. 누구나 들어와 조용히 책을 읽고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이 서점에 점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점에는 카드결제 단말기와 거스름돈이 비치돼 있으며, 책을 구매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현금, 혹은 카드결제를 하면 된다.
매장을 방문해 본 결과 3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방명록에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쪽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이달의 책 추천’ 테이블에는 책과 함께 추천사가 놓여 있었다.
매장을 방문한 한 손님은 “점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카메라도 있고 구매한 내역을 적는 종이도 있다”며 “각박한 세상에 서로 위로하는 글을 쪽지에 남기는 점도 좋았고, 아무도 보지 않지만 양심껏 계산하니 뿌듯한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열정에기름붓기 관계자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국내외 도서를 소개한다는 목적에 맞춰 (무인서점을) 운영 중”이라며 “지금까지 도난 사고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술로 가득 찬 세상에 ‘양심’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또 다른 무인화, ‘셀프주유소’와 ‘톨게이트’
2003년 국내에 도입된 셀프주유소는 또 다른 무인화의 예시다. 2009년에는 ‘강남 최초’의 셀프 주유소가 설치됐다. 도입 직후 주유원이 주유를 하고 계산하는 데 익숙한 소비자와 초기 높은 설치비용 때문에 셀프주유소가 확산되지는 못했다.
한국주유소협회 관계자는 “일반 주유기를 설치하는 데 500만 원의 돈이 드는데 반해 셀프 주유기는 1,500만 원에서 2,000만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며 “6개의 일반 주유기를 셀프 주유기로 전환하면 약 1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 결국 3배 이상의 비싼 초기비용을 지불해야 셀프 주유소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럼에 불구하고 셀프 주유소는 빠르게 늘어났다. 주유소 입장에선 인건비와 관리비를 줄일 수 있었고, 소비자 입장에선 유인 주유소보다 저렴한 주유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셀프주유소는 점차 늘어나 2017년 기준 전체 주유소의 약 20%를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처음 통계가 작성된 2011년 전국 셀프 주유소의 숫자는 약 400개였으나, 2014년 1,500개, 2017년 2,300개 이상으로 빠르게 늘어났다.
주유소 관계자는 “셀프 주유소가 도입된 지 15년 가까이 지난 현재, 사용법도 많이 알려지고 소비자의 거부감도 줄었다”며 “조금이라도 저렴한 주유소를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진 것도 셀프주유소가 늘어난 이유로 꼽힌다”고 말했다.
비교적 최근 도입된 무인 시스템으로 하이패스(Hi-pass)를 들 수 있다. 하이패스는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와 유료도로의 톨게이트에 설치돼 요금소마다 정차해 요금을 지불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무선통신을 이용해 지불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으로 DSRC(Dedicated Short-Range Communication, 근거리 전용 통신)를 사용하여 통행료를 정산한다.
2000년 한국도로공사가 시범 실시 계획을 발표한 이후, 2005년 인천, 남인천, 하남, 토평, 김포, 시흥, 구리 등에 하이패스 차로가 개통됐다. 2007년 말에는 전국 모든 영업소에서 개통됐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고속도로 하이패스 이용률은 2017년 기준으로 80%를 넘어섰다. 하이패스 단말기는 총 1,651만대 보급됐으며, 하루 평균 하이패스 교통량은 317만대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