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김기식의 젠틀맨통신] 대기업 플랫폼과 중소기업 인프라가 만난다면

by 김기식

2016년 04월 21일

글. 김기식 지에스앰엔투앤 영국법인장

 

Idea in Brief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천정부지로 치솟은 부동산 임대료, IT 기술의 발전, 그리고 영국 물류 대기업들의 네트워크 개방이라는 3박자가 맞아 떨어지면서 전통 택배 사업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플랫폼으로 네트워크 개방을 시도하는 물류 대기업들과 이를 활용하는 소형 업체들은 이제 전통적 택배 사업의 기본 자산과 위치 등에 대한 기본 공식을 무너뜨리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국내 물류업계 또한 이를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택배 사업은 전통적으로 물류센터와 배송 차량을 갖춰야만 했다. 하지만 소형 택배업체들은 전국 혹은 글로벌 규모의 망을 갖추기가 어려워 특정 지역을 벗어난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과거에는 대형회사의 물류 IT 시스템을 중심으로 각 지역별로 대리점 사업자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택배 회사의 역량이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상승한 물류센터 임대비, IT 기술의 발전, 그리고 물류 대기업들의 발상 전환,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이런 전통적 관념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영국의 택배 사업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직후 영국의 부동산 임대료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특히 영국 남동부 런던과 히드로 국제공항 주변의 물류 부동산 임대료는 소형 택배사업자들에게는 재앙과 같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물류센터를 임대하게 되면 임대료뿐 아니라 물류센터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사업료(Business Rate)라는 일종의 지방세를 지방 정부에 납부해야만 했다.

 

 

이 사업료는 지역마다 편차가 있으나 히드로 공항 주변은 물류센터 임대료의 절반 이상까지 발생하여 엄청난 비용 부담이 생긴다. 따라서 어느 정도 기초 체력이 구비된 회사들만 국제 택배를 할 수 있는 일종의 진입 장벽이 생겨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비용이 비싼 공항 주변이 아니더라도 택배 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바로 물류 대기업들의 발상의 전환과 IT 기술 덕분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직후 어정쩡한 규모의 전국구 택배 회사들은 문을 닫거나 DHL, 페덱스(FedEx), DPD 같은 업체들에게 흡수되었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인 물류 대기업들의 각 지역별 로컬 허브는 규모나 서비스 측면에서 운영에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일단 담당 지역을 커버하려면 배송기사와 차량에 대한 더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한 개의 허브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을 넘어서기도 했을 뿐더러,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경쟁구도가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물류 대기업들은 발상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자체 영업 조직을 운영하면서 일일이 뛰어다니지 않고, 각 지역별로 있는 자신들의 허브 지역 내에서 더 촘촘하게 흩어져 있는 소형 택배업체들에게 계좌(Account)를 열고 물류 시스템을 B2B 형태로 개방시켜 주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A라는 소형 택배 업체에게 DHL이 계좌를 오픈해 주고 알아서 영업해 물량을 가져오게 만든 것이다. DHL은 A업체로 하여금 고객사 혹은 개인 고객에게 DHL 운송장 출력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화물 배송 추적 같은 다양한 형태의 DHL 서비스를 A업체의 물류 시스템 혹은 DHL 네트워크에 바로 연결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계좌 계약이 존재하지만 외국의 경우 특정 허브가 아니라 DHL의 전국적인 허브와 모든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계약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인천 공항 지역 DHL 허브와 계약을 한 A업체가 부산에 있는 고객에게 그 지역 DHL 서비스를 A업체의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탄생한 새로운 영업 형태가 있다. 트랜스글로벌 익스프레스(Transglobal Express)가 대표적인 사례다. 트랜스글로벌 익스프레스는 TG라는 자체 배송망도 갖추고 있으면서 TNT, DHL, UPS 등과 계약을 맺고 각 고객사들에게 각각의 서비스와 판매 가격을 고객이 직접 비교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구현했다.

 

▲ 트랜스글로벌 익스프레스의 견적 제안 웹사이트

 

고객이 자신이 보낼 화물의 무게를 입력하면 여러 가지 물류회사들의 가격이 검색된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업체와 가격을 선택하면 해당하는 업체의 운송장을 출력하고, 해당 업체가 화물을 픽업하러 오거나 혹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업체의 허브에 직접 접수 할 수 있도록 옵션을 다양화했다. 고객이 집 혹은 회사 근처에 어느 업체의 허브가 있는지 파악한 후 직접 가서 접수하면 더 저렴하게 보낼 수 있는 고객 중심적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이렇게 물류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허브와 시스템을 개방하자 물류 업무의 영역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즉, 로컬 배송만 하던 업체들은 전 세계 국제 배송이 가능해 졌으며, 특정 국가에만 강점이 있어 소수의 로컬기업 고객 물량만 취급하던 소형 국제 택배사들은 이제 전국 어느 곳이든 픽업이 가능해져 영업망을 전국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로컬 택배사와 국제 택배사와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대형 물류사의 물류망 내부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즉, 물류 대기업은 소형 업체들에게 플랫폼의 역할을 제공하며 소형 업체들이 스스로 물량을 늘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으로 시작된 또 하나의 괄목한 만한 특징은 이제 택배업체가 자신이 일정 물량만 확보할 수 있다면 굳이 차량이나 물류센터를 임대할 필요 없이 집에서도 로컬부터 국제까지 어떤 형태의 택배업이든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일반 택배사업체와 집에서 잘 꾸민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물류 대기업의 서비스를 중개하는 중개업을 구분짓던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영국의 간편한 회사 설립 시스템과 특별히 업종과 업태의 제한도 없으며 자본금에 대한 규제도 두지 않는 기업 환경이 있다. 어느 누구라도 자본금 1 파운드와 10만 원 정도의 회사 등록비용만 있으면 자유롭게 유한회사를(Limited) 설립할 수 있다.

 

 

플랫폼으로 네트워크 개방을 시도하는 물류 대기업들과 이를 활용하는 소형 업체들은 이제 전통적 택배 사업의 기본 자산과 위치 등에 대한 기본 공식을 무너뜨리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물류는 규모의 싸움이라며, 대리점이나 지입 차량 확보에 주력하는 한국 택배 산업계에서 눈 여겨 볼 사례다.



김기식

필자는 영국 유학시절 런던 시내에 소화물을 배송하는 현장 아르바이트로 국제 택배업에 발을 딛기 시작하여 현재는 한국 지에스엠 앤투앤(GSM NtoN)의 영국 법인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영국 소화물 택배 물류단지인 콜린부룩의 생태계에 관심이 많으며, 현재는 이들과 연합하여 이커머스 물류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다음 읽을거리
추천 기사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