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서비스의 역사] 한국식 우버? 10년 전부터 있었다고! ②
디지털 도입, 그리고 한국식 퀵 생태계 형성의 역사
글. 김동현 체인로지스 대표
Idea in Brief
기술발전과 디지털의 역사. 지금도 하루하루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퀵서비스의 역사 또한 디지털의 역사와 함께 변화를 거듭해왔다. 수기에 의존해 할당량만 처리하던 지역 퀵서비스 사무실로 시작해, 통신장비의 발전으로 ‘광역’의 시대가 도래 했다. 한편 넓어진 범위와 빨라진 속도에 따라 진통도 있었으니, 사무실 간 상처뿐인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기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제는 플랫폼 프로그램 중심의 ‘공유’ 시대다. 새로운 체계를 갖춰 규모의 경제로 나아가는 시대. 디지털 퀵서비스의 과거와 현재, 그 역사를 들여다본다.
퀵서비스 시장에 본격적인 자본 투입이 일어난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퀵서비스 1 세대쯤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통신기기와 프로그램이 사용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이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퀵서비스 사무실들은 체계를 갖춰 규모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마케팅을 시작했고, 데이터 축적 또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퀵서비스 시장. 이전까지 특정지역에 한정돼 운영되던 서비스가 지역 외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시스템을 갖춰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통하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디지털, 그 변화의 시작
퀵서비스 시장에 디지털 기술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2000년대 이전 한 프로그램 업체로부터다. 일본 퀵서비스 시스템을 국내에 들여와 비슷하게 구현한 업체가 등장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매우 신선했다. 기존에는 기사가 특정지역의 사무실에 출근해 해당 지역 내 주문만 처리하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반면 이 업체는 TRS 무선통신기기를 이용해 서울 및 서울 근교까지 업무 범위를 넓혔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성행하던 이 방식이 지금의 ‘공유형 퀵서비스’의 초기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퀵서비스의 업무 흐름을 글로 적어 보면 상당히 간단하다. 고객에게 서비스 요청 전화가 오면 접수 직원이 전화를 받아 접수를 마친다. 그리고 해당 주문을 배차 전담 직원이 인접지역에 위치한 배달기사에게 무전을 통해 배정한다. 그러면 해당 기사는 다시 통신을 통해 주소 등 주문 정보를 확인한 뒤 업무를 진행한다.
하지만 이 간단한 프로세스에 디지털 요소가 빠져버린다면, 대규모·광범위 퀵 사무실 운영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선 발신번호 표시 기능이 없다면, 수많은 접수 직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오는 서비스 요청 전화를 빠르게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지역 내 소규모 사무실에서 1~2명의 접수 직원이 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받은 주문들은 다시금 신속히 배차 직원 및 기사와 공유해야 하며, 문의 전화라도 오면 다시금 접수 직원들과 공유해야 한다. 지난 기술이지만, TRS 무선통신기기와 구식 휴대전화는 퀵서비스의 지역적 한계를 무너뜨리고, 실시간 소통을 가능케 하는데 이바지했다.
이때부터 퀵서비스에 ‘광역’이란 용어가 생겼다.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택시를 예로 들면 승객을 싣고 목적지까지 이동해 늘 빈차로 돌아오다가, 오히려 목적지 주변 승객을 싣고 다시금 출발지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것과 같다. 이는 기사들에게 분명 운행 효율성을 가져다줬지만, 반면 여러 가지 단점도 발생했다. 새로운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한 기사는 수입이 좋아졌으나, 그렇지 못한 기사들은 그저 남은 주문만을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존의 순번제와는 완전히 다른 업무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바람과 함께 기사들의 수입이 천차만별로 갈리기 시작했다. 보다 빠르게, 좋은 주문들을 낚아채야만 효율적 운행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기사들의 이동거리가 꽤나 늘어났다. 퀵서비스 사무실 한 곳에서 발생하는 오더의 밀집도가 이전 방식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기에 픽업(Pick-up) 거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이동거리도 늘어난 것이다. 기사들은 길 위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다. 오토바이를 타는 시간도, 주문을 대기하는 시간도 모두 길 위에서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피해갈 수 없는 마케팅 전쟁
디지털화를 바탕으로 시장규모가 커지고, 매체를 통해 여러 차례 언급되다보니 퀵서비스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는 한층 상승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본 투자가 따라왔다. 2000년도 초부터 몇몇 회사들이 투자를 바탕으로 몸집을 불려나갔다. 이들의 마케팅 방식은 크게 2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전단지를 무한정 배포하는 방식이었고, 두 번째는 114(당시 데이콤)에 회선을 많이 깔아 홍보하는 방식이었다.
기존에는 퀵 사무실 사장이 지역 내에 홍보 전단지를 배포하던가, 기사들이 주문을 처리하면서 눈에 띄는 업체마다 전단지를 건네는 정도였다. 허나 지역 경계가 없어진 이후 훨씬 더 많은 전단지 수량이 필요했고, 이는 시간과 인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영업사원을 두고 지속적인 비용을 들여 전단지 배포 및 고정 거래처 관리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퀵서비스 업계에 영업사원이 생겨났다. 이들은 분명 퀵서비스 보편화에 이바지했다. 허나 본인만의 거래처를 가지고, 각종 커미션을 받으며 철새처럼 돌아다니거나, 스스로 독립하기도 했다. 필자가 보고들은 바 퀵서비스 업계에 추가 자본이 들어오는데 악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다.
또 하나의 마케팅 방식인 114 데이콤 회선 광고는 철저히 투자 자본의 힘으로 가능했던 방식이다. 지금으로 치면 네이버 클릭광고라 할 수 있다. 당시 소비자들은 업체정보를 인터넷 검색이 아닌, 114 전화문의를 통해 얻었다. 즉 지금처럼 검색에 잘 노출되기 위해 보다 많은 돈을 들여야 한 것이다. 인터넷 광고는 클릭 횟수에 따른 금액이지만, 114는 회선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가 노출을 결정했다. 회선 보유량이 많으면 매달 그 만큼의 회선비를 내야하는데, 경쟁이 심화된 이후에는 결국 이 회선비를 체납하는 퀵서비스 업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반면 기사 운영이 공유형이 아니다 보니, 늘어난 오더에 비해 기사수급이 여의치 않은 퀵 사무실은 주문을 받고도 처리를 못해 취소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주문 처리를 위해서는 전화 한 통이면 되지만, 주문 취소의 경우 최소 두 통 이상의 전화가 오가야 했다. 사무실 내부 업무 효율도 갈수록 떨어지는 악순환이다. 그러니 업체 여건과 회선비를 잘 계산한 운영이 필요했지만 그게 어디 생각처럼 되는가. 갈수록 심화되는 회선 광고 경쟁에 비용은 늘고, 이후 회선 과포화가 찾아와 광고 효과는 나날이 떨어지고 말았다.
전쟁의 끝, 한국식 퀵 생태계 만들다
경쟁 심화 끝에 퀵서비스 업체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하나는 단가를 낮추는 방식, 또 다른 하나는 홍보 전단지에 쿠폰을 찍어 혜택을 주는 방식이었다. 단가 절감은 주로 주문량이 많아 매출이 큰 거래처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들과의 거래는 매출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할인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초기 5~10%의 할인율에서 많게는 20~30%까지 할인하는 업체가 생겨났다.
단가 절감 초기에는 사무실이 조금 감내하는 식이었겠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할인율까지 올라가면서 결국 기사들의 몫이 됐다. 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저단가 논란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20년 전 서비스 가격이 지금보다 좋았던 것으로 회상한다. 반면에 유지비는 상당 수준 올랐다. 이러한 구조는 퀵 사무실과 기사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 없고, 결국 소비자 또한 저품질의 서비스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 아닐까? 보통 이쯤 되면 업체 간 통폐합과 함께 시장 재편이 이뤄질 만한데, 퀵서비스 시장은 그러지 못했다. 이 부분은 추후 짚어 보겠다.
쿠폰도 비슷하다. 다만 이 경우, 처음부터 기사들의 몫이었다. 지역기반 퀵서비스는 기사가 하루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해당 사무실의 일을 받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사무실에서 쿠폰을 발행했다간 운영은커녕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기사들이 쿠폰을 사서 지급하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 기사들도 초창기에는 ‘내가 건당 천 원을 더 받으면 별 문제 없다’는 생각에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쿠폰은 철저히 기사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자리 잡았고, 이후 광역에서는 수행한 주문만큼 일정 금액을 공제해 줬다.
헌데 쿠폰마저 경쟁으로 건당 가치가 올라갔다. 한 건당 대략 500원 하던 것이 1,000원으로, 나중에는 2,000원짜리 쿠폰이 돌아다녔다. 기사는 1만 원짜리 주문 하나를 수행하면서 2,000원짜리 쿠폰을 주고, 남은 수익으로 연료 등 유지비를 대며 배송한 것이다. 본인의 서비스에 가격 결정권조차 없었던 기사들에게 얼마나 열악한 구조였나 생각이 든다. 고객 영입을 위한 가격 경쟁과 리베이트는 결국 모두 기사들이 몫이 됐다. 공유체제로 완전히 전환된 현재는 거의 사라진 모습이나, 약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지된 이 방식이 한국의 독특한 공유생태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생각한다.
다시 디지털이 해결하다
변화의 흐름 속, 영세 퀵서비스 업체들도 방책이 필요했다. 초기에는 대형 업체에 부탁해 거래처만 유지하자는 생각이었으나, 대형 사무실에서 업무 데이터를 가지고 거래처를 빼가기 시작하니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업도 밀리고, 기사 수급도 밀리는 상황에서 중소 퀵서비스 업체들 간의 연대는 필연이 아니었을까. 연대가 확장함에 따라 퀵서비스 사무실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 또한 자연스레 활성화 됐다.
초기 연결 프로그램은 엑셀에서 기능이 조금 추가된 단순한 형태였다. 주로 퀵서비스 대표들끼리 모여 주문 및 업무 기록을 주고받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됐다. 서로 간에 처리가 어려운 주문을 공유함과 동시에, 공유한 주문 한 건마다 수고비 명목으로 대략 500~1,000원을 정산해줬음으로 정확한 기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요를 반영해 프로그램 진화가 이뤄졌다.
퀵서비스 업체 연합은 크게 2 개의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발전시켰다. 하나는 우람소프트를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현재 최대 점유율을 기록 중인 인성소프트를 사용했다. 서로 간에 주문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유’ 기능을 처음 넣은 것은 우람소프트였다. 더불어 프로그램 사용요금 부과 방식도 바뀌었다. 1회 금액을 지불한 뒤 프로그램을 구매해 쓰던 방식에서, 월 단위 일정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초기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퀵서비스 업계의 소문은 오토바이를 타고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공유 기능 덕분에 어려움이 있던 주문이 처리가 되더라’, ‘공유 덕분에 주문이 없던 곳에서도 주문을 차고 나올 수 있게 됐다’는 등의 좋은 소문들 덕분에 이용률이 갈수록 올라갔다. 퀵서비스 공유경제가 퀵서비스 사무실과 기사들의 니즈를 반영해 열리기 시작한 순간이다.
결국 이 프로그램들의 급성장은 대형 퀵서비스 업체 자체를 없애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퀵서비스 사무실 주도의 구조에서 프로그램사 주도하에 사무실과 기사가 동등한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를 통해 사무실 간 무분별한 경쟁이 새롭게 견제받기 시작했으며, 기사들이 부담했던 저단가를 막는 순기능이 나타났다. 허나 정작 물건을 의뢰한 고객은 본인의 물건이 어떤 환경 속에 배송되는지 손쉽게 알 수 없는 불편함도 생기게 됐으니, 이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다.
여전히 퀵서비스 시장은 체계를 갖추고 있는 상태다. 지금의 시점은 자본 투자와 함께 규모의 경제가 시작되는 시기라 말하고 싶다. 한편 디지털 장비들의 보편화에 힘입어, 애초에 프로그램사가 주문 고객의 수요를 반영해 공유경제를 실현했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퀵서비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이 시장을 오랜 시간 겪고 또 사랑해온 필자의 마음이다.
<지난 시리즈>
[김동현의 퀵서비스의 역사 ①] 한국식 우버? 10년 전부터 있었다고!
20대 초반 무작정 용달차 한대와 전단지를 제작해 퀵서비스와 소화물 배달을 시작했다. 서울 하늘 아래 안 밟아본 도로 없고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는 모두 들어 가봤다고 감히 생각한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고민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고객관점의 당일 도착 서비스를 고민 중인 곳이라면 오토바이타고 어디든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