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SBS에서 방영된 <은밀하게 과감하게, 요즘 젊은 것들의 사표>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였다. 어느새 ‘퇴사’라는 단어는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직장인들의 퇴사 준비를 돕는 업체가 나타났으며, 이직을 위한 자소서워크숍, 커리어 설계, 심지어 코딩을 배우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퇴사준비생의 도쿄>는 이러한 퇴사 열풍 속에서 등장했다. 퇴사 이후에도 맞닥뜨리게 될 ‘먹고사니즘’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겠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웃나라 일본, 그 중에서도 도쿄에서 가치 있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매장 25곳을 찾아내서 소개했다. 여기서 ‘가치 있는’ 비즈니스란 트렌드를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퇴사준비생의 도쿄>는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의 말을 빌려와 ‘10년 후의 변화를 예측하기보다, 10년 후에도 변치 않는 것’을 담아냈다고 한다. 한 순간 빛나는 트렌드가 아니라, 변치 않는 ‘비즈니스 원칙’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온라인의 시대에 맞서는 오프라인
많은 상품들이 온라인으로 거래되고 유통되는 시대에, 기존의 오프라인 비즈니스는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퇴사준비생의 도쿄>는 25개의 오프라인 매장을 통해서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발굴하고 그 원리를 살폈다. 각 매장마다 각기 다른 비즈니스 전략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25개의 매장은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오프라인 공간을 새롭게 비즈니스화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온라인에서 쉽게 제공할 수 없는 상품을 판매하는 셈이다.
가령 <퇴사준비생의 도쿄>에 나온 ‘이토야’라는 문구점이 있다. 문구상품의 고급화와 맞춤화를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제공될 수 없는 ‘현장감’을 오프라인에서 판매하고 있는 회사이다. 고깃집에서 경매라는 경험을 주는 ‘호우잔’이라는 가게도, 숟가락으로 긁어먹는 참치를 파는 ‘마구로마트’도, 온라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요컨대, <퇴사준비생의 도쿄>가 소개하는 가게들은 아마존의 시대에도 10년은 버틸 수 있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인 셈이다. 그 속에서 상품의 유통과 물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살펴본다면, 유통·물류의 다음 변화를 미리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니코니코렌터카 : 유휴공간을 찾아오도록
‘니코니코렌터카’는 주유소의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렌터카 주차 공간’, ‘각 지역별 소비자가 접근할 수 있는 매장’, 심지어 '손님응대에 필요한 직원’까지 한 번에 해결한 렌터카 업체다. 니코니코렌터카는 유휴공간의 주인인 주유소 점주와 계약을 맺어 렌터카 대여 수익을 분배한다. 계약 이후 유휴공간을 관리하는 것은 주유소 점주이다. 렌터카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부터, 차량관리 그리고 손님응대까지 맡는다. 렌터카 판매와 관련된 사고처리와 정산 등 고객이슈는 니코니코렌터카가 부담한다.
▲ 주유소에 니코니코 렌터카 차량 2대가 주차해 있다.(사진제공= 트래블코드)
이렇게 주유소의 남는 공간, 점주의 남는 시간까지 활용함으로써 렌터카의 대여비용은 낮은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퇴사준비생의 도쿄>의 대표 저자인 이동진 트래블코드 대표에 의하면 비용은 소형차 기준으로 12시간 대여에 2525엔이다. 이는 일본 내 주요 렌터카 업체는 물론이고 카쉐어링 업체의 절반 수준의 가격이라고 한다.
물론 유휴공간을 찾아내서 주차공간, 다시 말해 차량에 대한 물류센터이자 매장으로 이용하는 사례는 기존에도 존재했다. 국내 사례로는 최근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유차량 서비스 ‘나눔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니코니코렌터카는 이와 정반대의 전략을 사용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유휴공간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유휴공간이 찾아오게 한 것이다.
아스톱 : 온라인을 쇼룸으로
쇼루밍(Shorooming)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오프라인매장을 전시실(Showroom)처럼 이용하고 가격이 저렴한 온라인에서 구매하는 것을 말한다. <퇴사준비생의 도쿄>에는 그와 정반대로 사업을 하는 가게가 등장한다. 피규어 전문매장인 ‘아스톱’이다. 아스톱은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지만, 오직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상품을 살 수 있다. 온라인 사이트는 상품검색 및 전시용으로만 사용된다.
▲ 아스톱 매장에서 대여하는 박스 공간
이 대표는 아스톱의 ‘온라인 쇼룸화’ 전략은 피규어 상품의 특성과 소비패턴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프라인 매장의 동선을 따라 걸으면서 상품의 우연한 발견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피규어의 주요 소비층이 ‘우연한 발견’으로 인한 상품 구매가 빈번하다는 분석에서 나타났다.
아스톱은 각각의 공간(큐브)마다 기간에 따른 임대료를 받는 식으로 수익을 올린다. 오프라인 매장을 유통업이 아닌 ‘임대업’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온라인 오픈마켓 비즈니스의 오프라인화라 할 만하다. 즉, 아스톱은 재고가 없는 매장이다. 이를 통해 재고관리에서 비롯되는 각종 위험(Risk)을 회피한다.
다시 말해, 재고를 보유하기 위한 창고비용, 현금화 되지 못한 재고로 인한 유동성 부족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간을 임대한 피규어 판매자 입장에서도 ‘상품 가격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므로, 기꺼이 아스톱 큐브에 입점하고자 한다. 소품종 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특성에 가까운 피규어라는 상품 특성으로 인해 오프라인 오픈마켓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대표에 따르면 아스톱과 같은 비즈니스가 꼭 ‘피규어’ 같은 상품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피규어뿐만 아니라, 각종 수제품과 중고의류에도 렌탈 쇼케이스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코메야 : 규모에서 범위로
식생활이 변하면서 쌀의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역시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일본 농림수산성이 발표한 ‘2015년 식량 자급률’에 따르면, 일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1962년 118kg에서 2015년 54kg으로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 쌀을 판매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견한 업체가 있다.
▲ 2~3인분으로 소분하여 판매되는 아코메야의 쌀(사진= 트래블코드)
<퇴사준비생의 도쿄>에 소개된 ‘아코메야’는 범위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쌀가게다. 이곳에서는 쌀을 포장, 판매하는 단위부터 작다. 2~3인분으로 소분하여 판매한다. 또한 쌀의 종류는 20가지가 넘는다. 하나의 쌀가게에서, 각기 다른 쌀을 소량포장하여 판매하는 셈이다.
상품의 다양성은 쌀 종류에만 그치지 않는다. 쌀가게 한 편에는 밥과 함께 먹기에 좋은 반찬을 판매하고, 쌀로 만든 사케도 선물용 쌀 코너에 함께 제공한다. 또한 식품을 넘어 주방기구와 식문화 관련된 책도 쌀가게에서 판매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판매하는 쌀로 만든 밥을 샘플로 제공하는 것을 넘어, 식당이 있어 직접 반찬과 함께 밥을 맛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표는 아코메야가 쌀의 시장성이 아니라 쌀의 속성에 초점을 맞춰 쌀을 중심으로 한 다이닝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 비즈니스라고 말한다.
▲ 아코메야는 매장에서 판매하는 쌀로 만든 식사도 판매한다(사진= 트래블코드)
이 대표는 아코메야는 쌀가게의 업을 재정의하면서 성공적으로 안착했지만, 이를 만든 모회사인 사자비리그는 아코메야 매장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며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사자비리그는 라이프 스타일의 제안이라는 핵심 역량을 공통분모로 아코메야를 비롯한 다양한 브랜드로 만들어 범위의 경제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는 고객의 세분화된 니즈를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라이프 스타일별로 별도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대표는 과거 유통업은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면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쌀시장은 규모의 경제 전략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범위의 경제’가 주목받을 것이라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하나의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전략에서, 하나의 생산시설에서 다양한 상품 군을 판매하는 전략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사자비리그의 아코메야라고 했다.
이처럼 <퇴사준비생의 도쿄> 속에는 아마존 시대에도 '변치 않을' 그리고 '지속 가능할'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담겨있다. 과거 길거리에서 흔히 보았던 쌀가게, 철물점, 문방구는 어느새 온라인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오프라인을 통한 상품유통 비즈니스가 남게 된다면, 그것은 <퇴사준비생의 도쿄>에서 만날 수 있는 가게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