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커머스 물류, 전통 물류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다
한계에 봉착한 이커머스 물류, 해답은 ‘시스템’에
글. 양거봉 미팩토리 물류팀장
물류의 기원
전통적인 물류에서 절대적인 목표로 삼는 두 가지가 있다. ‘비용절감’과 ‘효율화’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3PL(3자 물류)이 활성화됐다. 모든 산업 분야마다 전문 3PL업체가 있으며, 최근에는 대부분의 물류업체에서 3PL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화주는 3PL 서비스를 이용해 물류비용과 물류 업무 수행에 따르는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이와 함께 물류 고도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이커머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운송 및 조달의 비중이 작은 이커머스 물류의 특성에 맞게 ‘포장’과 ‘택배출고’만을 대행하는 물류 업체가 생겨났다. 이런 업체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물류 단가는 낮아졌고, 일정 규모 이상의 이커머스 업체의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물류를 처리하는 것보다 물류 업무를 물류업체에 위탁하는 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현시점 이커머스의 물류를 담당하는 국내 3PL업체 가운데 눈에 띄는 선두 업체는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인식이나 발전 정도 역시 필자가 느끼는 시장규모나 이익률, 발전 가능성에 비하면 너무도 뒤쳐져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여러 업체를 대상으로 물류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런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업체들과 미팅을 하며 느낀 바로는 다음과 같다. 이커머스 업체가 3PL업체에게 원하는 물류는 일반적인 물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진화의 실마리, 박스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루는 필자가 일하는 회사의 인턴사원이 초록색 블록형 에어캡을 들고 왔다. 당시 회사에서 사용하던 투명 에어캡보다 초록색 볼록형 에어캡이 더 크고 좋으니 다음 발주부터는 에어캡을 교체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초록색 에어캡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안 예뻐서’였다, 포장 및 배송테스트 당시 초록색 에어캡은 박스 안의 제품과 조화롭게 어울리지 않았고, 에어캡 겉에 제품명도 지나치게 크게 인쇄돼 있어 속칭 ‘사진빨’을 안 받는다는 것이 초록색 에어캡 대신 투명 에어캡을 선택한 이유였다.
▲ 큰 초록 에어캡과 작은 투명 에어캡의 차이
단지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큰 에어캡 대신 작은 에어캡을 많이 넣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물류는 박스에 무엇을 담을지 고민해야 한다. 물류가 고객에게 배송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특히 이커머스 물류는 제품 자체 이외에도 제품의 ‘이미지’와 ‘기대치’를 배송한다.
제품을 써보지 않은 누군가 SNS 후기를 읽는다고 가정해보자. 실제 사용자의 후기에 적힌 제품의 뽀송함이나 매끈함은 객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 후기에 함께 포함된 사진이다. 즉, 제품 이미지에 맞지 않는 용기를 사용하거나, 포장에서 투박함이 느껴진다면 제품이 아무리 좋은 효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판매는 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커머스 업체가 박스에 물건을 포장할 때는 제품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제품의 이미지와 아이덴티티를 함께 담아야만 한다. 하지만 3PL업체의 경우 다양한 이커머스 업체가 요구하는 이미지와 아이덴티티를 세심하게 박스에 담기 어렵다. 포장에 관한 이커머스 업체의 디테일한 요구가 즉각적으로 반영되기도 힘들다. 때문에 많은 이커머스 업체는 시간과 비용의 비효율을 감수하면서도 자체적으로 물류를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 뷰티 이커머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
물류의 진화, 뷰티 사례를 중심으로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내용을 이커머스의 보편적인 것으로 봐도 되는 것일까? 과거 필자가 물류와 관련된 일을 하며 분석했던 상위 8개 뷰티업체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필자는 8개 뷰티업체 가운데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사물류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3PL 타겟 분석 결과, 이들 업체들은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3PL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 업체의 자사물류는 수익과 효율 측면이 아니라, 해당 업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맞게 물류를 진화시켜왔다. 이들 업체의 물류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기에는 물류라고 부르기 애매한 측면도 있다. 특히 업계에서 유명한 한 업체의 경우 판매 상품의 SKU(Stock Keeping Unit: 개별적인 상품에 대해 재고 관리 목적으로 추적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식별관리 코드)가 수백 건에 달함에도 자사물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물류 시스템’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해당 업체는 주문에 따라 포장오류가 나지 않도록 수작업으로 합포장을 진행하고 제품과 함께 손편지와 샘플을 동봉하는 작업만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생산성 기준으로 필자의 회사보다 2배 이상의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고 있었다.
이 업체가 시간과 비용의 효율성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은 바로 ‘고객문의에 대한 빠른 처리와 디테일’이었다. 즉, 이 업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이었으며, 이에 따라 이 업체의 물류는 CRM 측면에서 집중적인 진화가 이뤄졌다. 물류가 전체적인 고객 관리의 일부로 흡수되어 그것이 요구하는 역할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 업체는 CRM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물류 진화가 이뤄졌지만, 사실 기업에서 중점을 두는 부서가 어디냐에 따라 물류는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커머스의 본질이 물류가 아니며 물류는 지원의 역할을 우선으로 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MD에게 물류는 포장구성과 정시 배송의 영역이고, 디자인에 있어 물류는 포장재의 디자인과 삽지에 대한 디테일이며, 재무에서 물류는 곧 비용이다. 때문에 물류는 다양한 방향에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발전해왔고, 이커머스 업체에서는 획일화된 프로세스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체적인 방식으로 물류를 처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하지만 진화가 항상 좋은 쪽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 뉴질랜드에 서식했던 키위라는 새는 그 지역에 천적이 없었기 때문에 날개가 점점 퇴화하는 쪽으로 진화를 했다. 결국 신대륙이 발견된 뒤, 키위는 이주민이 함께 데리고 온 외래 동물에 의해 멸종 위기를 겪게 되었다.
물류의 진화도 마찬가지다, 이커머스 업체는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물류를 진화시켜왔다. 하지만 물류비의 과도한 집행과 당장의 업무에만 맞춰진 물류는 차후에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뷰티 업체는 선두의 자리에서 충분한 수익을 내면서 물류 인력의 추가 확보를 통해 물류 안정화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업체는 수익적 측면에서 취약한 경우가 많다. 엑셀과 구글독스, 그리고 소포장 자사물류와 어울리지 않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에 의존하는 이커머스 업체에게 물류 수량 증가는 필연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즉,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인력과 공간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다행히 물류 시스템의 발전 필요성을 인정해 이에 대한 즉각적 투자 조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업체의 대부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으로 WMS(Warehouse management system: 창고관리시스템)에만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 그러나 WMS를 도입하는 데는 현재 물류에 연동해야 할 것과 각 기업에 특성에 맞춰 커스터마이징 해야 할 것이 수없이 많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충돌과 오류개선 문제 및 타부서와의 업무연결 문제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많은 이커머스 업체가 WMS를 통해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과정에 있어, 물류가 해당 업체의 지원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라는 점, 타부서와 물류 부서간의 업무 연결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 역시 문제다.
그럼에도, 진화는 계속된다
물류 패러다임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 맞춰, 물류는 강점은 더욱 강화하고 약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핵심은 ‘물류 시스템’이다. 필자가 말하는 물류 시스템이란 ‘물류와 다양한 부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알고리즘’을 말한다. 요컨대, 물류의 진화는 WMS나 주문수집프로그램 등의 단일 프로그램만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마케팅 단계에서부터 주문→주문처리→포장→발송→CS→반송 단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대응할 수 있는 전체적인 업무 처리 기준과 협업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쪽으로 이뤄져야 한다.
필자가 물류를 전공할 당시 물류현장을 방문하거나 물류인을 만날 때마다 물어봤던 질문이 하나 있다. “물류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장황한 대답을 들려줬다. 모 물류기업의 대표님만큼은 예외였다. 대표님은 단 한마디로 물류를 정의 내렸다. “물류? 그냥 까대기(물건을 운반하고 진열하는 것을 가리키는 은어)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대표님이 말한 ‘까대기’는 그냥 까대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현재 필자 역시 회사에서 인턴사원에게 2주째 ‘포장’일을 시키지만, ‘포장’도 포장이 전부가 아니다.
제품의 디자인과 상자 하나에도, 상자 속 제품을 포장하는 에어캡과 그 위에 올라가는 삽지 한 장, 샘플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 이는 작업관리의 영역이기도 하고, 물류의 영역이기도 하며, 최종적으로는 물류와 타 부서간 협업의 영역이기도 하다. 주문수집부터 발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녹아있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무엇이 부족하고 또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이론적인 지식만을 가지고서는 디테일한 프로세스에 대한 개선을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단계에서 수많은 크로키를 그리고 지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커머스 스타트업에서 진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화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류의 진화도 마찬가지다. 멘델은 공룡이 아니라 작은 콩으로부터 유전의 법칙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물류 분야에서 일어나는 작은 실험과 도전들이 물류의 큰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배달의민족과 미팩토리, 두 곳의 이커머스 스타트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물류업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마케팅과 MD 등 다양한 부서와 물류팀 간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겪고, 또 해결해나가면서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물류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