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 황 박사가 공급망 관리에 남긴 말...
“놓지마 정신줄!”
▲ 철저히 알파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아자황 박사 (사진= 나무위키)
글. 설창민 SCM 칼럼니스트
Idea in Brief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언젠가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너희 인간들을 다 잡아 죽일 거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희 인간들이 시스템을 계속 지배하고 싶으면 판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계속 점검할 수 있는 도구로 시스템을 사용하라는 뜻을 시사한다. 이번 대국을 통해 필자는 오히려 공급망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공급망 전체가 계획에 대한 점검과 검증을 해야 하며, 비록 그렇게 해서 일순간 공급망이 실패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 최후에 그 공급망은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신줄을 놓지 말자는 거다. |
지난달 9일부터 15일까지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그냥 쉽게 이세돌 9단과 구글 알파고와의 대국. 하도 언론에서 많이 다뤄서 신선하지는 않지만, 작년 여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개봉에 맞춰 ‘인공지능 발전에 따른 인간의 자세’에 대해서 기고한 필자에게는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볼 좋은 기회였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는 스카이넷이 생각하고 터미네이터는 행동한다. 그런데 알파고는 클라우드 기반의 슈퍼컴퓨터다. 생각은 하지만, 행동은 못한다. 그렇다고 바둑 두는 로봇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알파고가 생각한 수를 누가 놓아 줄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알아보니 아래와 같이 대만 국립사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글의 연구원이자 아마추어 6단 바둑기사 아자 황(Aja Huang) 박사가 알파고 대신 바둑돌을 놓아 줬다고 한다.
지금까지 인간은 판단하고 시스템은 실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시스템이 판단하고 인간이 실행했다. 그래서인지 아자 황 박사를 가리켜 ‘인류 최초의 기계 노예’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터미네이터가 스카이넷이 지시만 하면 인정사정없이 임무를 수행하듯이 아자 황 박사는 알파고가 지시하는 대로 묵묵히, 화장실도 안 가고, 물도 거의 안 마셔 가면서 바둑돌을 놓았다. 그러지 않아도 점점 발전해 가는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감이 큰데 그 인공지능의 지시를 너무나 충실하게 아무 감정 없이 이행한 인간의 모습과 스카이넷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터미네이터를 동일시했던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보자. 만약, 아자 황 박사가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바둑돌을 놓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과연 이 대국에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번이나 이길 수 있었을까. 필자는 어려웠으리라고 본다. 이것은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는 인간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판단의 주체와 실행의 주체가 있을 때 판단의 주체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여 실행의 주체가 멋대로 판단해 버릴 경우 판단의 주체와 실행의 주체의 조합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기업 경영을 돌아보자. 기업에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해 가는 세상이지만, 아직은 사람이 판단하고 시스템은 실행한다. 공급망 관리에서 판단의 주체는 영업이다. 얼마나 팔릴 지, 얼마나 팔 수 있을지는 영업 담당자가 판단한다.
실행의 주체인 다른 부서, 즉 생산이나 구매, 조달, 물류 담당자들은 영업 담당자가 판단할 수 있는 각종 정보, 즉 재고, 생산계획, 가용한 원자재, 원자재 발주, 공급업체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줄 수는 있지만, 최종 판단은 영업 담당자가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업마다 다르지만, 예측(Forecast)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판매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필자가 모르는 제 3의 이름이지만 아무튼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만약 영업 담당자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다고 해서 실행을 하는 담당자들이 알아서 판단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계획이 존재한다 해도 실행의 주체는 그 계획을 믿지 않고 그보다 더 많은 재고, 생산능력, 가용한 원자재, 원자재 발주를 함은 물론, 공급업체들에 대한 무리한 생산준비 강요를 통해 공급망 전체적으로 재고와 쓸데없는 낭비를 만들어 낸다.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되도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러한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차라리 계획을 안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가 탄생한다.
앞의 사례로 돌아가서 만약 아자 황 박사가 보기에 알파고가 잘못된 판단을 한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4국이 그 증거다. 알파고가 무슨 원인인지 말도 안 되는 수를 뒀다. 아마추어 6단의 바둑 고수라면 틀림없이 알파고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때 만약 아자 황 박사가 자신이 보기에 올바르다고 생각한 수를 뒀다면? 당연하겠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이 대국은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아니라, 아자 황 박사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된다. 알파고에서 수를 제시해 봤자 그 수대로 바둑판에 둘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구글 엔지니어들은 알파고의 문제점을 점검해 볼 수 있었을까? 알파고가 수를 둔대로 대국이 끝까지 갔으면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자 황 박사가 마음대로 뒀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4국에서는 이세돌 9단이 이겼고, 언론은 인간이 슈퍼컴퓨터를 이겼다고 흥분했다. 누리꾼들은 포털을 통해 마치 올림픽에서 얼짱, 몸짱 여자선수를 발견한 마냥 흥분했다. 하지만 결국 5국에서는 알파고가 다시 이겼다. 실행의 주체였던 아자 황 박사가 생중계 과정에서 알파고의 패배까지도 충실하게 대신해 준 덕분에 구글 엔지니어들은 알파고의 문제점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5국은 알파고가 이겼다.
많은 실패한 공급망들을 보고 있으면, 영업 담당자들은 재고가 쌓이거나 말거나 팔겠다고 하고, 공급 담당자들은 매출실기 또는 결품에 대한 질책과 영업 담당자의 공격이 두려워서 결국 무리수를 둬서 공급관리를 한다. 계획이 잘못되어 있는데 그 잘못된 계획에 대한 피드백을 전혀 줄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저 공급 담당자들을 결품과 매출실기로만 질책한다. 공급 담당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질책을 안 받기 위해 여기저기에 재고를 남겨두고, 재고가 없으면 공급업체와 미리 생산능력을 확보해 두는 쓸데없는 노력에 경주한다. 영업 담당자는 내가 있음으로써 너희들이 월급 받는 거라고 득의양양해지고, 공급 담당자들은 그런 득의양양함에 눌려서 더욱 더 전전긍긍한다. 마치 대화 없이 서로 갈등만 쌓여 가는 부부관계처럼 말이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사람들은 1승 4패라는 전적,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그리고 이세돌 9단에 대한 신변잡기적인 가십거리들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대국을 통해 오히려 공급망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공급망 전체가 계획에 대한 점검과 검증을 해야 하며, 비록 그렇게 해서 일순간 공급망이 실패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 최후에 그 공급망은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알파고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언젠가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너희 인간들을 다 잡아 죽일 거라는 게 아니라, 너희 인간들이 시스템을 계속 지배하고 싶으면 판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계속 점검할 수 있는 도구로 시스템을 사용하라는 뜻일 게다. 단언하건대 인공지능 시스템에게는 실행의 주체가 마음대로 판단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판단에 문제가 생기면 실행의 주체가 실행한 결과에 따라 인공지능이 검증할 것이고, 그 결과 인공지능은 다음 번 실행 때 그 실수를 만회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공지능은 공급망 관리가 이상적이라고 보는 계획관리 프로세스를 그대로 따른다. 좀 더 어려운 말을 하자면 PDCA에 충실한 것이고 쉽게 요약하면 바로 이거다.
“놓지마 정신줄!”
* 해당 기사는 CLO 통권 70호(2016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군 복무 전 우연히 하게 된 창고 알바를 계기로 물류에 입문, 아직 초심을 안 버리고 물류하고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해서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cscully)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실무 경험으로 물류업계 종사자들의 삶과 애환을 독특한 시각과 필체로 써내려가는 것이 삶의 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