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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이그룹의 탄생 - 포목점 ‘에치고야’

by 콘텐츠본부

2015년 06월 19일

 

 

미쓰이그룹의 탄생

포목점 ‘에치고야’

 

글. 이영재 기자

 

Idea in brief

오늘날 일본의 재벌인 미쓰이그룹의 모태인 에치고야(越後屋)는 에도의 포목점이었다. 창업자 미쓰이 다카토키는 거상이 많기로 유명한 이세지역 출신으로 대대로 전당, 양조업을 영위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제들과 함께 가업에 종사하다 51세 되던 해인 1673년 에도 니혼바시(日本橋)에 에치고야를 설립했다.

 

 

소비도시 에도(江戶)의 건설

 

도쿄의 기원인 에도는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관동(關東)이봉 으로 그 역사를 시작한다. 당시의 에도(江戶)는 바닷가 어촌에 불과했다. 성과 무사들의 거주공간 등 모든 것을 새로 지어야 했다. 따라서 철저한 계획 하에 성곽과 조카마치(城下町)등이 설계되었다. 조카마치란 “성 아래 마을”이란 뜻으로 성내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를 말한다. 에도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03년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가 성립되면서부터이다. 에도성 건축은 1606년 시작되어 163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성 뿐만 아니라 다이묘들의 저택과 새로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할 주택, 교량건축과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이 시행되었다. 때문에 노동자와 전국의 무사들이 모여 거대한 수요를 형성했다. 또한 식료품, 생활용품부터 건축자재, 금, 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모든 물자가 에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이 시기에 시작된 산킨코타이제도는 일본 전국을 에도 중심의 경제권으로 묶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산킨코타이(參勤交代)제도

 

산킨코타이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시기인 1635년에 반포된“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에 의해 공식적으로 성립된다. 산킨코타이란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와 쇼군(將軍)이 거주하는 에도에서 1년씩 교대로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다이묘의 처자는 인질로서 에도의 저택에 살게 된다.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고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산킨코타이제도, 그러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왜 그랬을까?

 

산킨코타이로 인해 전국의 다이묘들이 의무적으로 에도로 왕래해야 했다. 지체 높은 다이묘들이 행차하는 자리이니만큼 잔뜩 멋을 부려야 권위가 살지 않겠는가? 때문에 산킨코타이는 각 다이묘의 권위와 번의 위세를 뽐내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카가(加賀)번 마에다(前田) 가문의 행렬은 4천 명에 이르렀다. 적을 때에도 2천 명에 달했다니 그 위세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호화롭고 사치스런 장식과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는 행차는 그 자체로 엄청난 구경거리였다. 행렬이 마을을 통과하는 데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역참도 큰 혼잡을 이루었다고 한다. 때문에 산킨코타이 시행 이후 가도와 역참의 정비가 더욱 진전되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렬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정해진 기한내에 에도에 도착했음을 감안하면 당시의 도로와 역참제도가 제법 충실히 정비됐음을 알 수 있다. 산킨코타이 행렬이 퍼붓는 막대한 자금은 지역경제를 살리는 기능도 있었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게 제공할 숙소와 식량, 각종 소모품 등을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이묘가 다른 번을 지나갈 때 그 번의 다이묘에게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각지의 명산품이 유통되는 기능도 있었다. 산킨코타이는 가도에 위치한 역참, 마을 인근의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이묘나 수행원들이 사용하는 일용품, 착용하는 의상 등이 역참을 통하여 전국 각지에 전파된 것이다.

 

이처럼 산킨코타이는 많은 인원과 물자가 이동하는 행렬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에도를 중심으로 한 도로망이 정비되었다. 대표적으로 고카이도(五街道)라하여 5개의 주요 간선도로가 유명했다. 첫번째 도로는 에도에서 출발해 태평양 연안을 따라 교토로 향하는 도카이도(東海道), 두번째 도로는 에도에서 출발해 중부 산간지대를 관통해 관서지방으로 향하는 나카센(中山道)도. 에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사가 있는 닛코를 잇는 닛코가도(日光街道), 에도에서 가이(甲斐國,현재의 야마나시 현)국을 거쳐 나카센도와 합쳐지는 고슈가도(甲州街道), 에도 북쪽의 우츠노미야(宇都宮)에서 시라카와(白河)에 이르는 오슈가도가 있다. 이 도로들은 자연스럽게 상품유통의 통로가 되었다. 전국 각지가 에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상품유통망에 흡수된 것이다.

 

막번(幕藩)제적 유통구조

 

막부는 17세기 초 에도와 오사카, 교토 사이의 막부직할령에 소속된 역참의 주민들을 동원해 물자를 유통시켰다. 이 역참들을 덴마슈쿠(傳馬宿)라 하는데 막부관리나 다이묘에게는 일반가격으로 제공하되 민간에서 이용할 경우에는 일반가격에 추가요금을 붙였다.

 

물자의 대량수송은 주로 선박에 의존했다. 일본은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수레의 이용이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막부와 각 번이 자체적으로 선박을 보유해 막부에서 필요한 화물이나 공무를 지닌 관리를 수송했다. 원래 막부는 1635년 ‘무가제법도'를 통해 다이묘들에게 500석 이상의 선박 건조를 금지했었다. 왜냐하면 도쿠가와 쇼군가의 통치를 위협할 수 있는 반란의 싹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선박의 필요성을 깨닫고 불과 3년 만에 상업용 선박에 관해서는 금지조치를 해제했다. 따라서 다이묘들도 대형 선박을 물자 수송이나 참근교대 등에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참근교대, 교통망의 활성화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민간 화물이 대폭 증가했는데 1627년경 오사카-에도간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카이센돈야(廻船問屋) 가 생겨났다. 이들은 민간 상인 또는 운송업자로 분류되었으며 에도에서 필요로 하는 막대한 물자를 수송했다.

 

이처럼 민간화물, 특히 쌀의 수요가 대폭 증가하면서 미곡의 유통이 매우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대량화물의 운송을 체계화할 필요성이 생겼다. 막부는 1671년 상인 가와무라 즈이켄(河村通)으로 하여금 동회항로(東廻航路) 와 서회항로(西廻航路)를 구축하도록 해 혼슈 연안의 해상운송체계를 정립했다. 특히 서회항로의 개설로 오사카가 물산의 집산지로서 그 지위가 더욱 확고해졌다.

 

 

운송업자들과 상인들은 주로 막부나 다이묘들이 발주한 조카마치 건설이나 영내 토목공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도(三都, 에도, 교토, 오사카)와 조카마치를 연결하는 유통구조가 정비되자 새로운 경쟁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기존 상인들이 대부분 어용상인으로서 성장했다면 신흥 상인들은 우리가 살펴볼 에치고야(越後屋)와 같이 도시민의 생필품을 취급하고 곡물, 직물을 유통시킴으로써 성장했다. 이들은 현금거래, 박리다매, 복식회계법 등 새로운 영업방식을 통해 기존 상인들을 압박했다.

 

 

미쓰이그룹의 모태 에치고야

 

산킨코타이로 인한 상업과 유통의 발달 이외에 주목할 것은 “유행”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점 이다. 오늘날 일본의 재벌인 “미쓰이”그룹의 모태인 “에치고야(越後屋)”는 에도의 포목점이었다. 창업자 미쓰이 다카토시는 거상이 많기로 유명한 이세지역 출신으로 대대로 전당, 양조업을 영위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제들과 함께 가업에 종사하다 51세 되던 해인 1673년 에도 니혼바시(日本橋)에 에치고야를 설립했다.

 

에치고야 에도본점의 주된 고객은 역시 다이묘와 막부직속 가신들과 상층 조닌들이었다. 에치고야는 상품판매에 있어 혁신적인 방식을 취했다. 당시의 상품판매방식은 견본을 가지고 고객의 집으로 방문해 주문을 받아 배달하는 방식이었다. 결제방식은 외상거래로 연 2회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에치고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점두판매와 현금거래를 고집했다. 점두판매란 점포에 모든 취급상품을 진열하고 고객이 선택한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현금거래를 통해 연 2회 수금하는 방식을 상시수금방식으로 바꾸어 자금운용에 융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한 판매방식이지만 이 시기에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문판매에 익숙했던 고객들을 어떻게 점포로 끌어모았을까? 고급 무사들과 조닌들은 굳이 점포까지 발걸음을 해야 한다는 것과 현금판매가 매우 불만스러웠지만 에치고야는 할인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에게 유인을 제공했다. 게다가 고객이 필요한 만큼만 옷감을 잘라 팔기도 했으며 제품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점원을 고용해 고객에게 상품에 대 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속 재단사를 고용해 급하게 의류가 필요한 고객의 수요에 대응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는 날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사치풍조가 늘어나 고객의 요구가 다양해진 것이다. 또한 에치고야는 오늘날의 전단지 마케팅과 같은 방식으로 고객들에게 점포를 홍보했다. 인파가 몰리는 곳에 에치고야의 로고가 그려진 우산이나 광고지 등을 뿌리는 마케팅을 실시했다. 에치고야는 사람들의 소비형태가 변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적극적으로 고객맞춤형 서비스, 고객에게 찾아가는 서비스를 시행한 것이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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