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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물류 이야기(3) 베네치아 vs. 포르투갈, ‘향신료’ 무역 전쟁의 서막

by 콘텐츠본부

2015년 05월 15일

베네치아 vs. 포르투갈, ´향신료´ 무역 전쟁의 서막

글. 이윤영 기자 | 이영재 기자



지난 300년간 향신료 유통을 거의 독점했던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1499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이 더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었다. 콜럼버스는 후추는 커녕 변변한 상품도 가져오지 못했지만 바스코 다 가마는 후추와 동방산물을 잔뜩 가져왔기 때문이다.



향신료시장으로 번영을 누렸던 베네치아는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대항해시대로 동서양이 직접 이어지기 전까지 향신료의 유입 경로는 <사진1>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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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동방산물의 유입경로- 중국의비단 도자기와 동남아시아?인도의 향료는 다음과 같은 경로로 유럽에 전해졌다. 바닷길은 기존에 해상실크로드라 불렸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불교학 자루이스랭카스터 미국 버클리대가 해상실크로드를 ‘스파이스로드’로 바꾸어 부르자 주장해 이목을 끌고 있다.



이 경로를 통해 향신료 뿐만 아니라 중국의 도자기, 페르시아의 융단과 같은 동방산물이 유통되기도 했다. 13세기 중반에서 14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간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대륙 대부분을 장악했을 때는 동서간 공급망이 매우 원활히 작동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무너지면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하는 육상 수송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의 통치에 있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난립한 것이다. 때문에 육로의 리스크가 증대되었고 이는 가격상승으로 이어졌다.



흑해 방면은 동방산물의 유통거점으로서 그 경쟁력을 잃었다. 반면 시리아와 이집트로 향하는 무역로는 안정을 유지했다. 후추의 유통과정 중 홍해와 페르시아 만에서 각각 알렉산드리아와 베이루트까지의 육로에 대상(隊商)을 이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로를 통해 수송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알렉산드리아와 베이루트는 베네치아의 정기선단이 기항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상은 20만 마리가 넘는 낙타를 동원해 수만 톤의 향신료와 각종 동방산물을 지중해 연안으로 운송했다. 낙타는 말에 비해 물과 먹이소모가 적어 사막에 최적화된 운송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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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국영조선소Arsenale)에는 2000명의 노동자가 상주하고 있었다. 전쟁발발 시 2개월 내에 전투용 갤리선 100척을 진수시킬 수 있는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갤리선은 안전하고 정시성이 뛰어났지만 노를 사용했기 때문에 범선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때문에 수송비가 높았던 갤리선은 주로 향신료와 같은 고부가가치 상품을 운송했다. 13세기의 갤리선은 100톤급 내외였지만 14세기에는 250톤급, 15세기에 이르러서는 300톤급 이상의 갤리선이 출현했다. 참고로 콜럼버스의 항해에 사용되었던 선박들은 120톤급에 불과했다. 이처럼 선박건조기술의 향상으로 선박이 대형화되자 단위당 수송비를 낮출 수 있었다.



16세기 초의 단위당 수송비는 1366년 베네치아 정기선단의 수송비보다 무려 절반 이상이 절감되었다. 베네치아는 혁신적인 수송비 절감으로 해운산업의 생산성을 높였다. 이는 비단 베네치아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었다. 서지중해의 무역도시 제노바의 경우 1000톤급 범선을 운영하기도 했다. 해상수송의 발달은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해양진출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는 동방에서 선적한 향신료를 본국에서 유럽 각지의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정기적인 대량공급을 통해 향신료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에서 1카리카(약 120kg)단위로 판매를 했다면 대서양 연안의 상업도시 브뤼헤에서는 1파운드 단위로 거래되었다. 이를 통해 베네치아에 공급되는 향신료의 총량은 다른 도시와 취급단위부터 다를 정도로 월등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네치아가 도매시장의 역할을 맡아 향신료를 대량으로 구매하면 다른 지역의 상인들은 소매상 역할을 함으로써 유럽 각지에 향신료를 유통시켰다. 15세기에 베네치아가 유럽에 공급한 향신료의 양은 유럽 전체 공급량의 70~80%에 달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1500년 베네치아로 유입됐던 후추의 총량은 2100 자루였다. 여기서 ‘자루’의 단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학자들 사이에서 카리카, 폰도, 스포르타가 주로 거론되고 있는데 대략 2만 톤에서 4만 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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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 유통과정


후추가격은 국제정세에 매우 민감했다. 전쟁이나 작황에 따라 1 카리카에 40~50 두캇인 경우도 있고 100 두캇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두캇 금화는 1284년 베네치아에서 주조한 금화로 당시 통용되던 기축통화였다. 두캇 금화는 3.56그램에 순도 0.997로 양화(良貨)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되면서 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그 순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1423년 베네치아에서는 집세를 제외한 1인당 연간 생활비가 15~20 두캇이었다. 이 정도면 후추의 가격이 짐작되지 않는가

서기 1500년 베네치아의 세입은 115만 두캇으로 한때는 1600만 인구를 가진 오스만제국의 세입과 거의 비슷했다. 특히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15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1인당 소득수준과 생산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보여준다.

이탈리아 본토에 보유한 영지와 해외 거점을 뺀 베네치아 시의 인구는 10~15만 명으로 추산된다. 베네치아는 부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베네치아의 향신료 교역에 큰 변수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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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기념비는 바스코다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워졌다. 1960년 엔리케항해왕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범선 모양을 한 이 기념비에는 과 항해 분야에서 공이 큰 인물들의 조각상이 조각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출

1499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인도 캘리컷에 당도한다. 당초 출항한 13척 중에서 6척만이 귀환한데다 시장가격을 흔들 정도로 많은 양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인도는 후추의 산지이면서 동남아 원산 향신료의 유통거점이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장악할 경우 향신료 무역에서 베네치아가 불리한 입장에 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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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 가마 다리는 1998년 인도항로개척 500주년에 완공되었다. 길이 17.2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를 두고 베네치아에서는 크게 2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번째는 포르투갈이 출항빈도와 선단규모를 늘리고 인도를 점령한다면 베네치아의 향신료무역은 위태롭게 될 것이란 반응이다. 두 번째는 절반이 넘는 배를 잃을 정도로 위험한 항해인데다 항로를 왕복하는 데 2년이나 걸리니 베네치아의 무역에 영향이 적을 것이란 반응이다.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출로 인해 베네치아가 몰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향신료 공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들을 공격한 것이다. 1509년 포르투갈 함대와 이집트-인도 구자라트 연합함대가 인도 디우 근해에서 전투를 벌인다. 포르투갈은 이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말라카, 고아, 캘리컷 등지에 기지를 건설해 무역로를 통제했다. 뿐만 아니라 향신료와 동방산물을 가득 실은 상선을 격침시키는 등 포르투갈의 무력시위는 계속되었다. 여기서 나아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봉쇄했다. 베네치아의 향신료시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베네치아로 와야 할 향신료가 인도양에 수장돼버려 향신료 공급이 마비된 것이다.

아무리 관광업, 제조업, 우편업과 같이 여러분야로 산업을 다각화 했다지만 향신료무역은 베네치아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향신료 공급이 마비된 베네치아의 손해는 날로 커져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젖줄이 끊긴 젖먹이”의 처지에 비유 했다.

포르투갈의 향신료 유통과정은 베네치아의 그것에 비해 매우 단순했다. 인도에서 포르투갈 선박으로 리스본까지 한번에 실어 나르는 것이다. 반면 베네치아의 향신료 유통과정은 이렇다. 먼저 이슬람, 인도 상인이 인도에서 향신료를 홍해와 페르시아 만으로 수송하면 사막의 대상(隊商)이 이를 시리아와 이집트로 운송한다.

그리고 다시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와 같은 교역도시에서 유럽 상인들에게 매매하는 방식이었다. 유통과정이 단순한 포르투갈이 원가경쟁력 측면에서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지나치게 비싼 가격에 후추를 매도했다. 향신료 공급이 끊기자 향신료를 리스본에서 매입할 생각까지 했던 베네치아였지만 역시 비경제적인 가격이라 판단했다. 오히려 이집트의 술탄과 협력해 수에즈 운하를 굴착해 인도항로를 개척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는 이집트 술탄의 변덕과 뒤이은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정복으로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오스만제국과 지속적으로 운하 굴착을 논의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베네치아 향신료시장의 회복

베네치아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포르투갈의 공급망 장악이 전적으로 군사력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은 인구도 약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한 소국이었다. 근본적으로 군사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인구‘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인도양 장악은 불과 몇 년 만에 한계를 드러냈다. 오스만제국이 1516년, 1517년에 각각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홍해, 페르시아만에서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상인 집단, 지방 유력자에서 거대제국으로 바뀐 것이다.

군사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홍해와 페르시아 만의 봉쇄가 느슨해지면서 베네치아의 향신료 유통은 다시 원활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베네치아의 향신료 도매시장으로서의 지위는 한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500년 베네치아의 국고수입은 115만 두캇이었다. 그동안 인도항로 개척 이후 지중해 무역이 쇠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런데 1570년 베네치아의 국고수입은 200만 두캇에 달할 정도로 인도항로 개척 이후보다 더욱 왕성한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격혁명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항해시대 직후 지중해무역이 쇠퇴했다는 견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베네치아의 향신료시장이 경쟁력을 잃은 것은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향신료 산지인 동남아시아 몰루카제도를 점령한 이후이다. 포르투갈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네덜란드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기보다 아예 생산지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운송방법과 유통구조 혁신으로 잘 버텨온 베네치아였지만 서서히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다른 국가들에 내주기 시작했다. 경제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겨간 이후 무역업과 해운업의 경쟁력이 떨어지자 베네치아는 관광업, 문화산업에 역량을 집중시킨다. 출판업, 코메디아(연극), 호텔업, 카지노산업과 같은 3차 산업을 통해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후 1797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에게 항복함으로써 베네치아는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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