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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물류이야기 (1) - 해항도시 베네치아

by 콘텐츠본부

2015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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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어떻게 무역대국이 되었나?



베네치아를 어떤 말로 수식할 수 있을까? 해안도시는 단순히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라는 의미이다. 항구도시라는 말은 해안도시라는 말보다 범위가 좁혀지긴 하지만 둘 다 베네치아의 역동성을 담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해항도시란 표현은 어떨까? 현재열 한국해양대 HK(인문한국) 교수는 ‘12-13세기 해항도시 베네치아의 역사적 형성’이라는 연구에서 해항도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해항도시란 바다에 면한 항구를 가지되 그 자체가 하나의 체계(System)로서 항구에 의존해 도시가 존재할 정도로 항구 및 해양활동이 지역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이다.”



개펄지대의 난민촌에 불과했던 베네치아가 어떻게 지중해 SCM의 중심축이 되는 해항도시로 성장했을까?



도시 베네치아의 형성 피난처에서 도시로

베네치아의 주민들은 육지에 아무런 발판도 없었고 , 토지를 경작할 수도 없었다 . 그들은 필요한 물건을 모두 바다 건너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 그들은 무역을 통해서 그처럼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 - 15 세기 비잔틴의 역사가 라오니쿠스 칼코콘딜레스



전승에 의하면 베네치아의 기원은 5세기경 훈족, 랑고 바르디족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발생한 피난민들이 개펄로 들어가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한다. 외적의 침입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농경과 목축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초기의 베네치아 주민들은 소금과 어패류를 곡물과 교환하며 경제생활을 영위했다. 시오노나나미의 ‘바다의도시 이야기’에서는 서기 538년 비잔틴제국의 카시오도루스라는 고관이 남긴 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한다.



이미 지령을 내린 바처럼 올해에 풍작이었던 이스트라의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라벤나로 수송하도록 조치하기 바란다 . 너희는 해안 부근에 수많은 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 될 수 있는대로 물건이 빨리 라벤나에 도착하도록 조치해주기 바란다 .”



우리는 이 문서를 통해 피난처’에 불과했던 베네치아가 점점 지역 경제를 구성하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또한 그들 소유의 배를 통해 해운 의뢰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형태의 포워딩이 아니었을까? 이스트라는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지역이고 라벤나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이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의 중심지는 먼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이기 때문에 명령(주문)의 전달과 관리?감독이 어렵다. 무엇보다 물품을 수송할 선박을 수배하고 선적지(이스트라)로 집결시키는 일이 매우 번잡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적지와 배송지의 중간에 위치하며 많은 선박을 보유한 베네치아에게 운송을 일임하는 편이 비용과 시간 모든 측면에서 편리했을 것이다.



해항도시의 초석 해상공급망 확보

‘삼호 주얼리 호 사건’,‘ 아덴만 여명작전’등으로 알 수 있듯이 해적은 예나 지금이나 해상 공급망의 큰 위험요소이다. 최근에도 인도양에 주둔한 다국적군이 해적을 퇴치했다는 뉴스를 간간이 접하고 있다. 최근 국방일보의 보도에따르면 청해부대는 2009년 이후 1만 1435척의 선박을 호송했으며 용역비 등을 환산한 경제적 가치는 7750억 원에 달한다.



해적은‘캐리비안의 해적’과 같은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대는 국가의 통치력이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시대이다. 따라서 해적으로 인한 문제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상재이외에 가진 거라곤 소금과 물고기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안전한 교역로, 즉 공급망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공급망의 교란을 방지하고 해항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드리아 해 곳곳에 숨어있는 해적들을 퇴치해야 했다. 베네치아 역시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차례에 걸쳐 해적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정적인 성과는 없었다. 때문에 안전항해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해적들에게 통행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이는 교역비용과 운임의 상승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해적의 신용에 의존했기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였음에도 리스크 해결에 물음표가 생기는 모순이 있었다. 991년경 취임한 원수 오르세올로 2세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해적소탕을 계획한다. 수년간의 준비 끝에 998년(혹은 1000년) 5월 9일4), 원수가 직접 지휘하는 함대가 베네치아를 출범했다. 많은 도시들이 베네치아에 순종하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아드리아 해연안의 다른 도시들도 해적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르세올로 2세의 원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베네치아는 이 원정으로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지역인 이스트라지방과 라구사, 자다르 등 아드리아 해 곳곳에 거점을 확보했다. 베네치아는 원정에 협력했던 도시들에게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각 도시들을 지켜주는 대신 도시들은 베네치아에 항구와 선원을 제공했다. 그리고 거점도시와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 시가를 보수하고 공공건축물을 지을 때 이스트라산 석재를 사용하거나 거점도시 주민들을 선원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곡물, 포도주, 올리브유 등 그들의 상품을 구매 혹은 유통시켜 거점도시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이는 거점도시들의 세력권 이탈을 막고 공급망을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가 있었다. 단순한 사업적인 개념의 공급망을 넘어서 하나의‘공동 운명체’를 이룬 것이다.



지중해에서는 노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갤리선이 널리 쓰였기 때문에 많은 선원이 필요했다. 베네치아는 배후에 알프스 산지를 끼고 있어 목재조달이 용이했던 반면에 선원 공급이 불안정했다. 인구가 부족한 베네치아에 있어 선원의 안정적인 공급은 최우선 과제였다. 선박을 가동하지 못하면 베네치아와 거점도시 간 물류체계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러 도시들이 공급하는 선원들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들이었다. 베네치아는 해적퇴치를 통해 거점들을 연결하는 해상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었고 거점들과의 유대를 통해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외교적인 노력

베네치아가 해항도시로 거듭난 데에는 해적퇴치 뿐만 아니라 치열한 외교적인 노력도 있었다. 9세기 초 프랑크왕국은 베네치아에 복종을 요구했으나 베네치아는 이를 거부했고 이어진 프랑크왕국의 침략을 물리쳤다. 결국 811년 프랑크왕국과 베네치아의 형식상 종주국인 비잔틴제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프랑크왕국이 베네치아가 비잔틴제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프랑크왕국 내에서 베네치아 인의 교역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과 프랑크왕국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시작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에서 향신료, 비단 등의 동방산물을 구입해 서유럽 각지의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베네치아는 서유럽 동방산물유통의 중심지로서 상당한 이득을 거두었다. 한편 베네치아는 992년에 비잔틴제국과 조약을 맺어 비잔틴제국에 해운과 해군력을 제공할 의무를 지는 대신 자치권과 비잔틴제국 영내에서의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받았다.



예를 들면 현재의 관세인하, 항만사용료 면제 등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동서교역의 중심지이자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베네치아상인 뿐만 아니라 지중해세계의 모든 상인들이 집결하는 장소였다. 비잔틴제국이 베네치아에 약속한 혜택 덕분에 같은 상품이라도 베네치아 상인이 유통시키는 상품은 더욱 저렴했다. 베네치아는 외교를 통해 물

류비를 절감시켜 가격경쟁력을 확보했다. 현대의 상황에 대입하자면 FTA로 인한 무역전환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곧 베네치아 영지의 물동량 증가와 베네치아의 무역이익 증대를 의미했다. 베네치아 영지의 항구들과 해운업자들은 호황을 맞이했고 최종 기항지이자 물류의 집산지인 베네치아는 곧 동방무역의 중심지 타이틀을 획득했다.



아드리아 해의 허브 베네치아

베네치아의 세력권에 편입된 아드리아 해의 여러 도시들은 요새화된 항구와 조선소, 물류창고를 갖추어 베네치아를 보조했다. 이로써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에 안정적인 해상거점을 구축했다. 그리고 외교적인 노력으로 상품의 물류비를 절감시켜 베네치아를 통과하는 물동량의 획기적인 증대를 이뤄냈다. 해적퇴치를 통해 구축한 거점들을 부가가치사슬로 엮은 셈이다.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아드리아 해의 공급망이 짜인 것이다. 베네치아는 진귀하고 값비싼 상품들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유통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도시와 해운업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 베네치아는 여러 보조항구들을 거느리고 아드리아 해의 물류허브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드리아 해의 중심 해항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를 기반으로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갔다. 11세기 후반 시작된 십자군전쟁과 맞물려 해운산업과 동방무역이 더욱 호황을 누렸다. 해운산업, 무역업에서 축적된 노하우와 신용은 1204년 제 4차 십자군 수송사업의 밑바탕이 되었다. 베네치아는 제 4차 십자군 수송사업으로 아드리아 해를 넘어 지중해 동부지역에도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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