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락인 기자의 물류비망록①
대한민국 미래 물류에 대한 의미 있는 탐구가 가능하려면 과거를 관통하는 역사의 움직임을 심도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6월호부터 새롭게 연재되는 <정락인 기자의 물류비망록>을 통해 국내 물류산업 발전을 위한 업계 선후배간 건실한 토론의 장이 되길 기대해본다.
<연재순서>
① ‘한국물류기자협의회’ 출범, 낡은 관행을 타파하다
② 김대중 대통령 후보 물류기지 방문 숨겨진 이야기
③ 기자 선배의 사기행각, ‘지명수배’ 내린 이유
④ 물류기자협의회 전임 회장들, 물류기자클럽에 길을 묻다
⑤ ‘중부권 내륙화물기지’ 입지선정 뒤바뀐 내막
⑥ 사기행각으로 간판 내린 ‘한국물류정보협회’
(계속)
1996년 1월3일은 필자가 월간 물류정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날이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그때는 ‘월간 물류시대(현 물류와경영)’, ‘월간 물류매거진’과 함께 3대 물류 잡지 중 하나였다. 물류는 범위가 넓어 육상운송, 해상운송, 항공운송, 철도운송, IT, 유통 등까지 포괄할 수 있었다. 햇병아리였던 나는 업계의 많은 기자들과 교류를 원했지만, 변변한 친목모임 하나 없었다.
그러다보니 기자들 간의 ‘정보교류’도 안 되고 있었다. 취재현장에서 만나도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헤어지기 일쑤였다. 또 경쟁 매체를 의식하는 풍토가 있었다. 물류 바닥에서 ‘너 따로’, ‘나 따로’ 모두 따로따로 놀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다른 업종의 기자들 모임에 참석했는데 부러울 정도로 운영을 잘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물류도 기자들이 좀 모이면 좋을 텐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꼭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렸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해사프레스(현 한국해운신문) 김성종 기자에게 내 뜻을 전했더니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미루지 말고 내가 직접 그 일을 맡기로 했다. 단순한 ‘친목모임’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의 순수성이 변질될 수 있고, 술판이나 벌이다가 흥청망청 할 우려도 있었다. 그러다 ‘사이비 집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물류기자들을 대표하는 ‘공식 기자단’을 출범시키기로 했다.
왜 기자들이 모이지 않았을까?
김성종 기자와 의기투합해 기자단 결성 준비에 들어갔다. 초대 회장을 누가 맡을 지 미리 윤곽을 잡아놓는 게 급선무였다. ‘기자단’의 명분과 위상을 감안해 종합물류지에서 맡아야 할 것 같았다. 그 대상이 3대 물류잡지로 좁혀졌다. 당시 현장을 뛰는 기자 중에 가장 연장자는 물류매거진의 이상직 차장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취지를 설명했다. “이 선배께서 회장을 좀 맡아 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는 아닌 것 같고, 다른 사람을 물색하라”며 기자단 출범 자체를 반기지 않는 뉘앙스였다.
물류시대의 이명윤 과장에게 전화를 했다. 보통 언론사에서는 평기자 다음에 차장인데 물류시대는 일반 회사 직제를 따르고 있었다. 이 과장에게 동참해 줄 것으로 요청하고, 회장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역시 냉담했다. 이상직 차장이나 이명윤 과장이나 경쟁지인 그것도 신출내기 기자가 기자단을 만든다니까 탐탁치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이제는 굳이 ‘물류종합지’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범위를 넓혔다. 김 기자와 둘이서 기존 선배들 중에서 신망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랬더니 공통적으로 한 사람을 꼽았다. 운송신문에서 발행하는 코리아쉬퍼스저널의 김성우 차장(현 물류신문 본부장)이다. 김 기자와 난 용산의 운송신문으로 찾아가 김 차장을 만났다. 커피숍에서 “초대 회장을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김 차장도 처음에는 고개를 흔들며 고사했지만 “후배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맡아 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출범식 때 회장 추천을 받고, 회원들 다수가 동의할 때”라는 단서를 달았다. 기자단의 명칭은 ‘(가칭)한국물류기자협의회’로 정했다. 1996년 5월11일(날짜는 정확하지 않음)을 D-day로 잡았다. 장소는 용산경찰서 앞의 한 식당이다.
그때부터 물류기자단에 참여할 매체를 선별하고 기자이름이 포함된 리스트를 만들었다. 약 20곳 정도가 됐다. 출범식을 알리고 참석해 달라는 공문도 직접 만들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이메일이 활성화되지 않아 일일이 팩스를 통해 공문을 전송했는데, 작업이 단순하지 않았다. 팩스에 오류가 많아 한 곳에 몇 번씩 재전송해야 일이 많았다. 팩스도 모뎀 수준이어서 전송에 걸리는 시간도 꽤 오래 걸렸다. 팩스를 보낸 후에는 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신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핀잔도 많이 들었다. 팩스 앞에 앉아있으면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기자생활 석 달 밖에 안 된 놈이 뭘 한다고 그러고 있냐”고 했다. 여기에는 “수고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격려의 의미도 담겨있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됐다.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나올까”하는 마음에 하루종일 설레임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비가 내렸다. 나와 김성종 기자는 미리 약속장소에 나가 선배나 동료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는 만큼 참석률도 신통치 않았다. 8시30분쯤 됐을 때 6개 매체 8명 정도가 모였다. 궂은 날씨에도 이 정도가 모였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인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물류기자단’ 출범을 선언하기에는 부족했다. 원래 모임을 추진하면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야 신이 나는 법인데, 좀 아쉬웠다.
출범을 한 달 뒤로 미뤘다. 나는 명단에 있는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한 달 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이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미리 단단히 약속을 받아서인지 참석자도 11개 매체 15명 정도가 나왔다. 기자들이 하나 둘씩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모두 일어나서 명함을 꺼내고 악수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예정대로 식순에 의해 회의를 진행했고, 기자단 운영방안도 논의해 결정했다. 회장은 김성우 차장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나는 ‘대외사업국장’을 맡았다. 이를테면 ‘간사’ 역할이다. 단순한 연락업무에 그치지 않고, 기자단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직함이었다. 기자단의 모든 대외업무는 ‘공식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기자단 윤리강령도 정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한국물류기자협의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업계 기생충이 아니라 ‘신호등’ 지향
물류기자협의회는 물류업계의 기생충이 아니라 신호등을 지향했다.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물류단체장이나 기업의 CEO가 바뀌면 관례적으로 ‘인터뷰’를 한다. 이전에는 매체들이 개별적으로 인터뷰를 추진하다보니 여간 비효율적이지 않았다. 단체나 기업입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인터뷰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물류기자협의회가 출범하면서 달라졌다. 개별인터뷰는 ‘공식인터뷰’로 대체했다. 인터뷰 내용도 회원들에게 질문을 미리 받아서 공식질의서를 만들었다. 인터뷰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있어, 현장에서 돌발 질문을 통해 차별화 하도록 했다. 말 그대로 ‘인터뷰 공동화’를 이룬 셈이다. 당시만 해도 일부 단체나 기업에서는 인터뷰 후 촌지를 주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것을 공식 거부했다. 물류기자협의회는 이런 낡은 관행들을 하나 둘씩 타파했다.
1990년대만 해도 ‘물류’라는 용어는 생소했다. 우편물을 받아보면 물류를 ‘물리, 문류’라고 표기한 것도 적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물류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설교통부에는 ‘물류’를 전담하는 ‘국’ 단위의 부서도 만들었다. 하지만 물류산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걸림돌이 많았다. 과도한 규제도 적지 않았다. 물류에 대한 지원도 절실했다.
문제는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물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물류기업들의 애로사항이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물류기자협의회는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정치권과도 활발하게 접촉했다. 공동 인터뷰의 범위도 정치권으로 확대했다.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국회 건설교통위원, 산업자원위원 등을 통해 물류 정책을 이끌어내고, 애로사항 해소에도 적극 나섰다.
who? 정락인
필자는 월간 물류정보와 주간 물류신문에서 5년 정도 기자로 일했으며, 한국물류기자협의회(현 물류기자클럽)를 창립했다.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시사종합지 시사저널에서 사회전문기자, 사회팀장, 탐사보도팀장을 지냈다. 현재는 탐사전문미디어 ‘정락인닷컴’의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