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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물류이야기 (2) 동지중해의 여왕 베네치아

by 콘텐츠본부

2015년 05월 14일

해운.무역에서 제조업까지, 공급망 중심에 선 베네치아의 비밀

글. 이윤영 기자 | 이영재 인턴기자(중앙대 무역학과 4년)



십자군전쟁과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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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세계체제의 8개 순회로





1차 십자군 이후 대부분의 십자군은 해로를 통해 성지로 떠났다. 그 이유를 물류적 관점으로 분석하자면 1차 십자군 이후 팔레스티나 지역에 십자군 국가가 생겨 해로를 통한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육로는 적국 셀주크투르크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십자군은 중장비를 착용한 보병 위주인데다 수송행렬에 발이 묶여 있는 반면 유목민족인 셀주크투르크는 기병으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셀주크투르크의 영토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반면에 해로는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했다. 베네치아, 제노바와 같은 해양도시국가들의 해군으로 이슬람 해적과 해군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01년 베네치아는 교회와 십자군 대표들로부터 십자군을 수송해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그 해에 체결된 베네치아와 십자군 대표단 사이의 운송계약에 따르면 2만 명의 보병, 4500명의 기사와 9000명의 종자, 4500필의 말을 수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베네치아가 해운산업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지만 십자군 측에서 의뢰한 규모는 국가 전체의 역량을 집중해야 할 정도로 버거운 것이었다.



베네치아는 상선을 징발하고 선박을 건조하는 등 나라 전체가 수송선박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원수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모든 선박에 18개월간 상업활동을 중지하고 베네치아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엄청난 도박이었다. 성공하면 그만한 이익이 따르지만 실패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에 모든 것을 걸었고 계약 내용에 부합하는 수송선단을 준비했다. 레판토해전을 제외하고 지중해에서 이정도 규모의 함대가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 4차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도인 비잔틴제국을 공격했다. 십자군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 자리에 라틴제국을 세웠다. 비잔틴제국은 바다 건너 니케아로 피신했다.



베네치아의 정기상선제도

1204년 제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영토의 8분의 3을 영유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인들은 영유권을 자신들의 무역환경을 개선시키는 데에 사용했다. 베네치아는 크레타와 이오니아 해, 에게 해의 섬과 항구도시들을 영유했다. 인구가 적은 베네치아로서는 넓은 영토를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매우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로써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 외부에도 해양기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항구들은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의 수출과 동지중해를 오가는 상품의 보관과 중간유통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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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십자군 이후 베네치아의 무역거점





동지중해 곳곳에 해양거점을 구축한 베네치아는 그 거점들을 발판삼아 레반트무역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베네치아에서 시리아, 알렉산드리아, 흑해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마치 고속도로와 같았다. 도중에 위치한 베네치아령 거점은 휴게소처럼 수리, 보급을 지원했고 안전을 보장할 함대가 주둔했다. 베네치아의 해운산업은 정시성과 안전 측면에서 다른 국가에 우위를 점했다.



베네치아는 1255년 ‘무다’라는 정기상선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4차 십자군 이후 베네치아가 누리던 독점적 지위에 제노바의 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노바 선박의 해적행위로 상선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베네치아는 정기상선제도를 통해 매년 흑해, 시리아, 알렉산드리아, 남프랑스, 플랑드르 등 지중해 동·서부와 대서양을 가리지 않고 수송선단을 파견했다. 지역과 수송물품에 따라 어떤 곳은 연 2회, 어떤 곳은 연 1회 출항했다.



특이한 것은 정부가 정기상선단의 출항시기, 규모, 선박크기, 선원 수, 정박항구와 운송료까지 항해에 관한 것을 세부적으로 규제했다는 점이다. 선단장 역시 정부에서 임명했다. 이렇듯 까다로운 규제로 어떻게 선단을 꾸릴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정기선단은 항구에서 우선적으로 선적할 수 있는 혜택이 있었으며 중소 상인과 선원들도 입찰을 통해 자신의 상품을 선적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일푼의 초보 상인이라도 콜레간차와 프레스티토 마리티모라는 융자제도를 통해 무역에 참가할 수 있었다.



선적을 원하는 상인들은 사무담당에게 선적할 상품의 양을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 상품을 선적했다. 제출한 상품의 양이 실제와 다르면 선적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꼼꼼한 확인이 필요했다. 선박의 크기가 200t급이 채 안되고 지금보다 선박을 수배하기도 어렵던 시기의 일이다. 선적량 계산이 잘못되면 지금보다 더욱 번거로워지는 것이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적하목록을 제출하는 점은 마치 오늘날 미국의 AMS(Advanced Manifest Service)와도 비슷하다.



정기선단은 외국 상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안전하고 규칙적이며 정시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상인 입장에서 매년 같은 시기에 일정한 규모 이상의 교역선단이 정기적으로 온다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규칙적이고 시간엄수에 철저하며 일정량 이상의 상품을 구매하는 거래처를 싫어하는 상인은 없는 법이다.



그리고 베네치아 해운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여객선 산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베네치아는 1380년부터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여행객들을 위해 정기 여객선단을 운영했다. 베네치아의 정기선은 흑해, 지중해, 대서양의 주요 항구는 물론이고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항구에도 기항했다. 민간 해운의 노선까지 감안하면 베네치아의 선박이 닿지 않는 항구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 전략 ) 대단했어 . 굉장한 광경이었지 ! 감동적이고 , 놀랍고 , 두려운 동시에 아주 신이 났다네 ! 이곳 항구에는 겨울이 오면 대리석으로 포장한 부둣가에 정박하는 배들이 있는데 , 도시의 가장 관대한 사람이 나에게 준 이 집만큼이나 거대하지 . ( 중략 ) 그 배들은 엄청난 양의 무거운 화물들을 싣고 있어서 선체의 대부분이 파도 밑에 잠겨 보이지도 않았다네 . 그 배는 돈 강을 향해 출항하더군 . 돈 강은 우리 배들이 흑해에서 가장 멀리 항해할 수 있는 곳이지 . 하지만 그 배를 탄 많은 선원들은 돈 강에서 내려 여행을 계속할걸세 . 코카서스를 넘고 ,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에 도착하고 , 더 나아가 멀고 먼 중국과 동쪽 바다에 도착하겠지 .”

- 중세의 대문호 페트라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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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유리산업의 중심지 무라노 섬. 화재 위험으로 유리산업 종사자들을 무라노 섬에 이주시키면서 유리공업단지로 변모했다.



베네치아의 제조업 진출

베네치아의 정기선단 중 면화를 수송하는 선단은 선박의 무게균형을 맞추기 위해 무거운 바닥짐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가치가 높아 수익이 보장되는 화물을 선호했다. 그런데 마침 면화 거래처인 레반트 지역에는 유리산업에 필요한 모래 산지였다. 따라서 면화를 싣고 돌아올 때 모래 등을 바닥짐으로 적재해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 후에는 유리공업의 원료로 재사용했다. 원료조달의 편리성으로 인해 유리공업이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제노바는 명반을 바닥짐으로 적재해 명반 수요지였던 플랑드르 지역의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원료 수입은 면화수송선단의 수지를 개선시키는데에도 기여했다. 면화는 저렴하고 수요가 많지만 부피가 커 용적을 많이 차지했기 때문에 이익률이 매우 낮았다. 예를 들어 시리아-베네치아 면화무역에서는 수송비가 약 10%로 가장 큰 비용을 차지했는데 이는 향신료,직물 수송비가 2~3%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큰 비중이었다. 그나마 이는 면화산지와 가깝고 비교적 대규모인 시리아 정기선단을 이용한 경우이다. 다른 노선이나 민간 선단은 면화를 적재할 선박수배가 어렵고 정기선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수송비 비중이 더욱 크다. 이러한 배경으로 말미암아 고부가가치 상품인 유리제품 원료가 바닥짐으로 각광을 받았다.



유리세공업자들이 조직적으로 유리제품을 생산하면서 베네치아의 유리산업 역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13세기에 이미 무라노 섬을 중심으로 유리 공업단지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유리제품 중에서도 안경, 샹들리에, 모래시계, 거울 등의 상품이 유명했다. 오늘날에도 명성이 자자한 베네치아 유리세공의 기원은 과거 상인들의 “바닥짐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의 무역구조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완제품 수입은 줄어들고 원료 수입과 완제품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중국, 이슬람, 인도의 경제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전과 달리 직접 2차 상품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면화수송과 명반의 수입으로 알 수 있듯이 직물산업, 염색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해운업의 발달로 원료조달이 쉬워지자 제조업도 발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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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의 칸디아. 현재는 헤라클리온으로 불리며 베네치아의 해외식민지 중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훗날 오스만제국의 침입으로 1645년부터 1669년까지 무려 25년간이나 방어전을 벌인 끝에 함락되었다.



베네치아는 해상네트워크를 통해 지중해 각지를 연결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를 조달하기 용이했다. 베네치아는 중계무역과 해운업으로도 호황을 누렸지만 직접 구축한 SCM과 정보망을 기반으로 제조업에도 진출했다.



오늘날에도 공장의 입지조건을 따질 때 원료조달이 용이한 곳, 물류운영이 쉬운 곳을 선호하지 않는가? 더욱이 동방 산물의 집산지인 레반트 지역과 베네치아 사이에 촘촘히 구축된 해상 네트워크는 원료조달 뿐만 아니라 완제품을 수출할 때도 편리함을 제공했다. 이 시기 베네치아는 왕성한 경제력을 자랑하며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전통적인 조선업과 유리공업 이외에도 견직물, 모직물산업이 발달했다. 이는 베네치아의 경제구조를 다각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경제구조의 다각화는 훗날 대항해시대로 향신료교역의 비중이 줄어들었을 때에도 베네치아경제가 활력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다.



< 참고문헌 >

 


  • 남종국 , 중세 말 베네치아의 해상 네트워크 」『 , 서양중세사연구 21 , 2008.

  • 남종국 , 중세 말 베네치아의 면화수송 」『 , 서양사론 87 , 2005.

  • 남종국 , 중세 말 지중해 무역의 성격변화 , 지중해지역연구 8 , 2006.

  • 남종국 , 4 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경제 발전 」『 , 전북사학 32 , 2008. · 로저 크롤리 , 우태영 역 , 부의 도시 베네치아 , 다른세상 , 2012.

  • 시오노나나미 , 바다의 도시 이야기 - 베네치아공화국 1 천년의 메시지 ( , ) , 한길사 , 1996.

  • 재닛 아부 - 루고드 , 박흥식 , 이은정 역 , 유럽패권이전 -13 세기 세계체제 , 2006.

  • 주경철 ,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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