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제는‘포장은 가장 낮은 비용의 재료로부터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1630년 식료품 포장에 대한‘유럽의 종이는 너무 낮은 품질이어서 심지어 식료품을 위한 종이가방에도 적합하지 않다’라는 기록이 있다.
초기의 종이는 수작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지기계가 발명되기 전까지 포장으로 쓰기에는 너무 비쌌다. 포장에 사용되었던 이집트에서는 가장 낮은 등급의 재활용 파피루스가 포장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주로 향을 포장하기 위해 재활용파피루스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낮은 등급의 파피루스에도 장점이 있다. 바로 파피루스를 태울 때 종이 자체의 좋은 향이 낫기 때문에 이는 고객을 유혹하는데 좋은 마케팅 수단이었다.
제지기술의 발명
그렇다면 포장의 기본이 되는 종이는 언제 우리에게 왔을까? 종이의 역사를 낱낱이 파헤쳐 보자.
파피루스
초기 포장에 사용된 종이류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집트, 로마, 그리스의 기록재료로 사용되던 파피루스였다. 먼저 잘게 쪼갠 파피루스 잎을 평평하게 깔아 그 위를 십자모양으로 쪼갠뒤 한층을 더 깔아 압착기로 누르거나 망치로 두드려 만들었다. 그 이후 햇빛에 건조시키면 유연성과 내구력이 생겨 그 위에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파피루스는 그전에 쓰이던 점토판에 비하면 내구성이 약했지만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값이 쌌기 때문에 대중화될 수 있었다. 로마인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파피루스는 크기, 두께, 색깔, 내구력 등으로 구분해 9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다양한 용도에 맞춰 사용하였다. 가장 낮은 등급의 파피루스와 재활용 파피루스는 포장에 사용되었다.
종이의 발명 : 채륜
종이(Paper)라는 단어가 그리스어인 파피루스에서 유래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섬유를 액체에 담그거나 혼합한다는 점에서 종이는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종이는 AD 105년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륜의 방법은 오늘날 종이를 만드는 방법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채륜은 기존 순수한 종이원료에 마, 석회나 헝겊 같은 다른 재료를 합성하여 더 단단하고 유연한 값싼 종이를 만들 수 있도록 제지법을 개선하였다.
제지기술의 전파
그러나 서양에 고대 중국의 제지기술이 도달하기까지는 몇 백 년이 걸렸다. 중국의 종이에 대한 명성은 널리 퍼졌지만, 그 기술은 전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750년 경 제지에 관한 기술은 당나라가 사마르칸트전투에서 아랍인들에게 패배하면서 붙잡힌 포로로부터 북아프리카에 전해졌다. 이렇게 전파된 제지 기술은 무어인들을 통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도입되었고, 1100년대에 이르러서는 발렌시아 근처의 하티바에 유럽 최초의 제지 공장이 지어지게 된다. 그 뒤 수백년이 지난 1400년대에 이르러서야 제지기술은 독일, 프랑스, 영국에 전파될 수 있었다. 종이가 전파되기 이전에 서양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피부로 만든 양피지나 송아지 피지에 문서를 기록했다.
오랜 시간 걸쳐 종이가 전파된 후에도 여전히 종이는 비싼 사치재였다. 1450년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인쇄할 때 대부분은 양피지와 피지를 이용하였고, 단 3권만이 고급 종이로 인쇄되었다.
원재료 절감을 위한 노력
더 값싼 원료의 발견: 짚, 황마, 재생펄프
1800년대를 지나면서 종이의 원료인 섬유의 대체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옥수수대, 대마, 황마, 면화, 사탕수수, 대나무, 이탄, 밀집, 폐지에서 종이를 생산하는 특허가 발명되었다. 이런 원료들로 만든 종이는 인쇄하기에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포장지로는 매우 적합했다. 1900년대 초에는 황마 섬유를 보강한 길고 강한 크라프트 목재 섬유가 등장하였다. 향후 50년동안 골판지는 이러한 크라프트가 보강된 마분지로 만들어졌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이는 상자가 크라프트 상자이다.
목재펄프
목재펄프를 사용한 제지법은 1850년대 상용화 되었으나 품질 면에서 넝마를 이용해서 만든 종이에 비해 질이 낮아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넝마는 여전히 종이제작에 있어서 최고의 재료였다. 하지만 목재펄프를 이용해서 만든 종이가 좋은 인쇄품질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을 찾아낸 뒤로는 신문제작에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목재펄프의 가장 큰 장점은 북미지역의 천연자원으로 공급이 매우 많아서 낮은 비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목재펄프와 종이의 공급은 남북전쟁(1865) 이후 언론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다양한 신문, 잡지, 책들이 일반 독자들에게 공급되었고 이에 따라 60, 70년대는“종이의 시대”라는 노래가 런던에서 유행할 정도로 종이 공급이 대중화되었다.
크라프트 용지의 등장
미국에서 1909년에 처음 만들어진 크라프트 용지는 매우 튼튼했기 때문에 포장용기로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크라프트 용지 제작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남부의 풍부한 소나무 자원 때문이었다.
매우 값이 싸고, 풍부한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크라프트 포장은 종이기반 포장 시장의 부분을 잠식할 수 있었다. 크라프트 용지는 거친 갈색 종이이므로 인쇄를 위한 좋은 종이는 아니었으나 더 얇고 강한 종이를 만들 수 있었고, 또한 재생 크라프트 펄프는 그 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포장에 사용될 수 는 재활용 용지 및 보드의 양을 증가시켰다. 때문에 크라프트 용지는 대개 포장 및 종이가방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솔리드 크라프트 보드는 우유팩과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사용되었고,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볍고 튼튼한 녀석, 골판지 상자(Corrugated and Solid Fiberboard)
1800년대 제지의 발명은 1900년대 초반의 골판지 운송상자를 낳았다. 골판지상자는 1900년대에 걸친 대량 분배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56년 영국에서 최초로 골판지 제조에 관한 특허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1871년, 포장 재료로 골판지를 이용한 첫 번째 특허는 미국의 앨버트 존스에 의해 발행되었다. 이 때 골판지는 파손을 방지하게 위해 유리병을 포장하는 완충재로 활용되었다. 끊임없는 소재연구, 개발을 통해 다양한 골판지 포장 형태가 개발되었다. 1890년 이미 현재 형태의 양면 보드를 개발했다. 1894년 톰슨과 노리스는 뉴욕시에서 특송 배달을 위한 첫 번째 양면 골판지 상자를 생산했다. 이 새로운 상자는“새로운 상자는 손상에 매우 강했고, 운반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인 교통수단에서 사용될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1906년 골판지 상자는 시리얼, 램프 굴뚝, 유리 포장 제품, 전분, 설탕 등의 여러 스타일로 제작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1920년대의 사용은 라디오, 페인트 및 백화점 제품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낮은 가격과 가벼운 무게의 골판지 상자는 생산자들이 경제적으로 역사상 어느 때보다 넓게 분배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1900년대 전반에 걸친 분배의 기하급수적인 확장은 갈색골판지 상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종이가 이젠 생활로 - 제지기계의 발명
종이 제작 과정은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종이의 가격은 여전히 높았으며 가장 낮은 품질의 종이만이 포장에 쓰였다. 그러던 중 1799년, 프랑스의 니콜라스 루이 로베르가 연속적으로 종이를 만들어내는 공정개발을 통해 롤-스톡종이를 만드는 초기의 기계를 처음 발명하였다. 그 후 엔지니어였던‘브라이언 동킨’이 설계를 보충하고, 몇 가지 기능을 더 추가하였다. 이 기계는 바로 푸어드리니어(fourdrinier)로 불리우는 제조기이다. 오늘날까지 일반적으로 쓰이는 기계이다. 기계화는 종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고, 제작비용을 감소시켰다.
1800년대 중반은 종이 변환의 창조적인 기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장지를 만들거나, 포장하는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1874년 미국 지표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 종이 가방을 만들기 위해 79개의 특허, 종이상자를 만들기 위한 특허가 66개 발행되었다. 1850년 편지에서 기계로 만든 종이의 비용은 수작업으로 만든 것에 비해 1/8가격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흔히 외국에서의 아침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종이봉투에 커다란 바게트 빵을 들고 한손에는 집채만한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종이가방은 식료품 소매거래를 가속화 했다. 1850년대 이후, 제조업체에서 처음으로 밀가루와 설탕을 종이봉투에 포장하기 시작했다. 종이봉투에 담긴 밀가루는 적은 양을 포장할 수 있었고, 재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량 포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제지기술의 발달로 점차 사용가능한 종이의 양은 늘어났고, 1800년대 중반에는 백화점이나 작은 상점에서 인쇄된 종이가방을 쓰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처음의 종이가방 역시 수작업으로 만들어졌으며, 소매업체의 이름이나 가게의 로고가 새겨졌다. 그리고 단순한 글자만을 인쇄하던 석판은 1800년대 후반이 되어서는 최대 14가지의 색상을 이용할수 있었고, 1870년대 사진제판술과 회색조제 판술의 발명은 그림라벨을 일반화 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봉투에서 상자로
1800년대 후반 인쇄 및 제지기술의 발전은 포장의 변화와 산업발전을 일으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은 더욱 많은 포장을 필요로 했다. 이런 니즈는 대량포장, 포장 및 라벨링에 대한 기계화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생산된 대량의 상품에 대한 마케팅의 필요성은 판매 메시지를 수행하기 위해 대량 인쇄의 성장을 동반했다.
산업혁명의 대량생산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저렴한 일회용 선적용기가 필요했다.
따라서 종이의 공급은 새로운 포장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변화되었다.
셋업박스의 등장
종이봉투의 인기와 함께 셋업박스가 발명이 되었다. 셋업박스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셋업박스는 우리나라에서 싸바리박스 혹은 사바리박스로 불리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뚜껑이 분리되는 신발 샀을 때 새신발을 담아주는 상자를 생각하면 된다.
셋업박스는 중국에서 부서지기 쉬운 차를 담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유럽에서는 1700년대에 만들어 졌고, 대부분은 미국으로 수입되었다. 당시 셋업박스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야만 했던 노동집약적 공정이었다. 과거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의 조립 작업을 수행했다.
화려한 셋업박스는 약물, 사탕, 보석, 화장품 등 품목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모양으로 이용되었다.
접이상자의 사용
안타깝게도 셋업박스는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완성된 채로 배송되었기 때문에 공간을 많이 차지했고 파손될 위험이 컸다. 셋업박스가 널리쓰임에 따라 단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발명가들은 상자에 제품을 포장할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찾게 되었고, 이는 접이식 상자의 발명을 초래했다. 접이식상자는 셋업박스보다 여러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판지를 사용하여 간단한 제조공정을 가지고, 상자를 조합하여 운송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운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할 경우에 접어서 쓰면 되었기 때문에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 보관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장점때문에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포장인쇄의 시작
포장지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알록달록한 무늬가 아닐까 싶다. 예쁜 포장지는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근거림과 설렘을 제공한다. 제지공정이 1800년대에 개발됨과 동시에 인쇄공정 또한 발전하기 시작한다. 1800년대 이전에도 극소수였지만 인쇄된 포장지가 있었다. 독일의 인쇄혁명가 구텐베르크의 나라답게 인쇄된 라벨 또한 독일에서 처음 발견됐다. 인쇄된 라벨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1500년대 푸게르가족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의 상인이었던 그들은 아시아와 유럽에 실크와 향신료, 모피(wool) 을 거래하였다. 초기의 인쇄된 포장은 제지산업에서 이용되었다. 포장지는 종이산업의 부산물로써 완성된 종이를 보호하기 위해 겉에 싸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중앙에는제지업자의 문장이나 디자인이 새겨져있었다.
1700년대 후반, 인쇄된 종이라벨은 특허의약품, 와인, 소스와 같은 양념통 유리병에 사용되었다. 초기의 단순히 제작자 식별을 위해 사용되었던 라벨은 점차 제품의 원산지를 표시하고, 구매자가 제조업체를 확인하고 품질을 추적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