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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아닌 비트(Bit)를 나르는 자들

by 박대헌 기자

2017년 12월 15일

온라인 콘텐츠의 흐름, 디지털 공급망의 탄생

디지털에 사용되는 물류전략, ‘정기 구독’과 ‘멤버십 서비스’

cover

 

디지털 공급망을 아십니까

 

2012년 한 논문이 출간됐다. 논문의 이름은 ‘온라인 디지털콘텐츠 산업의 공급사슬관리 연구 이슈’*이다. ‘공급사슬관리’와 ‘콘텐츠’라. 물류 하는 독자 입장에선 생뚱맞아 보일 수 있겠다. 어찌됐든 이 논문의 저자는 포털 사이트가 생산·유통하는 디지털콘텐츠의 공급사슬관리(Supply Chain Management)에 주목했다. 디지털 콘텐츠에도 공급 사슬이 존재하며, 이에 대한 전략이 중요하다는 논지였다.

*윤종수, 온라인 디지털콘텐츠 산업의 공급사슬관리 연구 이슈 (한국컴퓨터정보학회 논문지 제17권 제5호)

 

여기에는 디지털 공급망(Digital Supply Chain)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 디지털 공급망이란 ‘콘텐츠 제공 업체에서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전자 매체를 통해 디지털 콘텐츠를 전달하는 과정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다시 말해, 기존 공급 사슬이 물리적인 재화를 바탕으로 한 용어였다면, 디지털 공급망은 공급사슬관리의 개념에 디지털 재화의 특성을 적용하여 디지털 콘텐츠 산업에 적합하도록 개선한 개념이다.

 

디지털 공급망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배경에는 ‘미디어 상품의 디지털화’*가 있다. 과거 책과 음악, 그리고 영상물은 물리적 재화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들 미디어 상품은 디지털 재화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IT 자문회사인 가트너는 이러한 변화를 “창고가 데이터센터로 대체되고, 상자는 비트(Bit) 단위로, 트럭은 네트워크 대역폭(Bandwidth)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물리적 재화에서 디지털 재화로 상품의 특성이 바뀌면서,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M&E) 기업은 새로운 공급망 관리 전략이 필요하게 됐다.

*Static Technology Institute, Digital Media Supply Chain

 

대표적인 성공적인 케이스로 애플의 아이튠즈가 있다. 아이튠즈는 사용자가 유료로 음원을 다운받고,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했다. 굳이 CD와 같은 물적 재화를 살 필요가 없이 디지털로 음원을 소비하는 프로세스를 구축한 것이다. 아이튠즈는 CD를 대체하며 디지털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으며, 2010년에는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69%에 이르렀다.*

*Bloomberg, Apple's 10-Year-Old iTunes Loses Ground to Streaming

 

그러나 디지털 공급망은 빠르게 변했다. 앞서 아이튠즈의 사례를 들었지만, 다운로드를 중심으로 한 공급망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급격히 이동했다. 미국 음반산업협회(RIAA)에 따르면, 미국의 2016년 음원 다운로드 시장은 전년 대비 21% 감소했다. 전체 음악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스트리밍에 역전된 지 오래다. 2016년 기준 스트리밍 서비스가 미국 음악 시장의 51%를 차지했다. 다운로드는 24%에 불과했다. 결국, 애플은 ‘애플뮤직’이라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2015년에 출시했다. 디지털 공급망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예는 국내에도 존재한다. 디지털 콘텐츠 사업자가 어떤 공급망 전략을 택했느냐에 따라, 사업이 성장궤도에 오르는 일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예는 ‘레진코믹스’가 있다. 유료 웹툰 서비스 업체인 레진 코믹스는 1주일 간격으로 웹툰을 공개하면서, 1주일 후에 공개될 연재분을 볼 권리에 대해 요금을 청구했다. 요컨대, 레진코믹스의 디지털 공급망은 ‘1주일’이라는 시간이 포함된 새로운 공급망 전략이었던 셈이다. 레진코믹스의 전략은 유효했고, 지난해 기준 연매출 391억 원과 4억 5천만 원의 당기 순이익을 거두었다.

 

이처럼 색다른 디지털 공급망 전략으로 시장을 공략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흔히 전자책이라고 불리는 디지털 텍스트 시장에서, 자신만의 공급망 전략을 내세우는 기업이 있다. 바로, 퍼블리와 북이오다.

 

거꾸로 뒤집힌 퍼블리의 공급망

 

퍼블리는 지적(Intellectual) 콘텐츠를 제작·유통·판매하는 회사이다. 이 회사의 디지털 공급망은 그 시작부터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전자책 회사였다면, 공급망의 마지막 단계, 즉 유통 및 판매 단계에 이르러 독자와 만나고자 했을 것이다. 보통은 제작을 먼저 하고, 유통을 하면서, 마케팅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퍼블리의 디지털 콘텐츠는 이것의 역순으로 콘텐츠 제작 이전에 독자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퍼블리 사이트의 메인화면에는 ‘예약 판매 중인 콘텐츠’라는 항목이 있다. 크라우드 펀딩* 형식으로 콘텐츠 제작비용을 모으는 것이다. 대개는 100만 원의 최소 목표 금액을 두고, 기간 내로 이 금액을 모은 콘텐츠만 제작에 들어간다. 이처럼 퍼블리의 디지털 공급망은 제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독자와 독자가 지불하는 ‘돈’이 먼저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다.

*크라우드 펀딩 :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 소규모 후원을 받거나 투자 등의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

 

예약판매

▲ 예약 판매 중인 퍼블리 콘텐츠

 

최소한의 독자와 돈이 모이지 않으면 퍼블리의 디지털 공급망은 다음 단계로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퍼블리는 페이스북 마케팅을 통해 그들의 독자를 ‘발굴’해낸다. 세밀하게 타깃을 나눈 후, 페이스북에서 반응을 보이는 집단에 대해 다시금 리마케팅을 실시한다. 그렇게 하나둘 독자를 발굴하여, 기간 내에 필요한 최소 목표 금액을 달성한다.

 

독자를 모으는 시점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간단한 콘텐츠와 저자 소개, 그리고 목차다. 여기에 모금 기한이 진행됨에 따라, 2~3분 내로 볼 수 있을 미리보기 콘텐츠가 1~2개 정도 더 추가되는 것이 전부다. 아직, 콘텐츠를 제작하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콘텐츠가 제작되는 시점은 기간 내에 목표 금액을 넘어섰을 때이다. 최소한의 독자와 돈이 모이고 난 후에야 콘텐츠 제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콘텐츠 제작에 들어가는 위험을 줄일 수 있고, 동시에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게 퍼블리의 설명이다.

 

퍼블리

▲ 콘텐츠별 목표금액과 각 상품별 가격이 나와있다.

 

또한, 퍼블리는 예약판매 기간에 ‘디지털 콘텐츠’와 더불어 ‘오프라인 상품’을 판매한다. 콘텐츠 제작이 끝난 이후에, 저자와 오프라인에서 소규모로 만날 수 있는 권한을 판매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출판의 경우, 저자와의 만남은 더 많은 책을 팔기 위한 마케팅 도구로 쓰인다. 공급망의 중간 단계에 있다. 그러나 퍼블리의 오프라인 상품은 공급망의 마지막 단계, 즉 이미 콘텐츠를 구매한 독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퍼블리 오프모임

▲ 퍼블리의 오프라인 상품인 저자와의 만남이 진행되는 모습

 

예약 판매 기간이 지나면, 퍼블리의 단권 판매 공급망은 일단 멈춘다. 말 그대로 더는 팔지 않는다. 이것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 대개는 예약판매 이후에도 상품을 팔기 마련이다. 그러나 퍼블리는 유료 다운로드와 유사한 단권 판매는 예약 판매 기간에만 제공한다. 그리고 그 기간을 넘어서 콘텐츠를 원한다면 공급망의 다음 단계를 제시한다. 바로, ‘멤버십 회원’이다.

 

퍼블리의 멤버십 회원은 정기구독 서비스다. 한 달에 2만 원 정도의 돈을 내면, 퍼블리에서 제작한 지난 콘텐츠를 전부 열람할 권리를 얻는다. 물론, 열람 기간은 멤버십 회원을 유지할 때까지로 제한된다. 말하자면, 텍스트 콘텐츠에 대한 스트리밍을 제공하는 셈이다. 결국, 퍼블리의 디지털 공급망 마지막 단계에는 멤버십 서비스가 존재한다. 독자와의 관계를 일회성 만남에 그치는 것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연결하려는 전략인 셈이다.

 

텍스트도 스트리밍으로

 

전자책 유통 서비스 회사인 북이오 또한 디지털 공급망의 마지막 단계에 정기구독 모델을 적용한 업체다. 이제는 책도 ‘구독’을 통해 소비하게 될 것이라는 게 강민수 북이오 대표의 설명이다. 마치 음원 시장에서 디지털 공급망의 형태가 다운로드에서 스트리밍으로 급격히 변했듯이, 디지털 텍스트 시장도 유사하게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

 

북이오의 라이브러리 서비스는 스트리밍 관점에서 만들어졌다. 출판사가 라이브러리 속에 자신이 출간한 책들을 넣고, 구독 기간 동안 라이브러리에 담긴 책을 전부 열람할 수 있는 권리를 파는 모델이다. 북이오의 디지털 공급망 속에서 출판사는 콘텐츠 제작자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독자의 피드백과 구독료를 받는 유통사의 형태를 취한다.

 

북이오만의 디지털 공급망 전략은 독자가 책을 만나는 단계에서 빛을 발한다. 강 대표에 따르면 우리가 기사를 접하는 통로가 신문사 웹사이트가 아니라 SNS 서비스이듯, 앞으로 독자가 책을 만나는 경로 역시 도서 플랫폼이 아니라 SNS가 된다는 전망이다. 이러한 관점이 기술로 구현된 것이 북이오의 딥링크다.

 

북이오1

▲ 페이스북을 통해 전자책에 대한 링크를 공유하는 모습

 

북이오에 따르면 딥링크는 하이퍼링크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기술이다. 기존의 하이퍼링크는 특정 페이지에 하나의 링크만을 제공했다. 그런데 딥링크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전부 링크가 연결되어 있다. 마치, 유투브 영상에서 특정 재생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딥링크를 바탕으로 북이오가 추구하는 디지털 공급망은 도서 ‘본문’ 노출이다.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래핑되어 읽을 수 없는 책과 정반대의 전략인 셈이다. 전자책을 출간한 출판사, 또는 전자책을 소비한 독자는 자유롭게 본문의 문장을 공유할 수 있다. 공유한 문장은 딥링크로 이어져서 웹에서 바로 본문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 링크를 통해 아직 전자책을 소비하지 않은 독자는 공유한 문장의 앞뒤로 일정 분량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장으로 가서 결제화면이 나온다. 충분히 음미하고 난 뒤에 구매를 결정하라는 뜻이다.

 

북이오2

▲ 공개된 본문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결제화면이 나온다

 

이렇게 북이오의 디지털 공급망은 독자가 책을 만나는 단계에서, 또한 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책을 소비하는 단계에서, 기존 공급망과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다. 도서 플랫폼이 아니라 SNS을 통해 책을 쉽게 접하고, 일정양 이상의 공개된 본문을 자유로이 읽고, 마지막으로 라이브러리의 정기 구독을 통해 지속적인 콘텐츠 소비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물류’와는 다르지만...

 

지금까지 디지털 텍스트를 판매하는 회사의 디지털 공급망 전략을 살펴보았다. 분명, 그들이 파는 것은 물리적 재화가 아니다. 따라서 물류 관리에 수반되는 재고와 물류비의 개념이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일반적인 공급망 관리의 재고 전략은 상품을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지 결정하고 저장 공간의 용량을 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디지털 재화에서 재고관리란 얼마만큼 트래픽이 나올 것인지에 따라 서버의 용량을 정한다.

 

그럼에도 퍼블리, 북이오, 두 회사의 디지털 공급망에서 일반적인 물류 서비스에서 보던 전략들을 엿볼 수 있다. ‘정기 구독’과 ‘멤버십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세제와 기저귀 등을 비롯한 생활용품, 면도날, 화장품, 애완동물 사료 등 많은 물리적 재화들에 대한 정기배송 서비스는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급망 전략 중 하나이다. 나아가 아마존프라임으로 대표되는 멤버십 서비스는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고, 지속적인 소비를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는 중요한 전략으로 사용된다.

 

물론, 디지털 공급망은 물리적인 공급망과 다루는 영역 자체가 다르다. 그러나 무엇인가 흐르고 있다는 관점에서는 유사한 점들이 존재한다. 디지털 서비스와 물류 서비스가 하나로 엮인 ‘스마트 물류’가 강조되는 시대다. 무형의 재화의 재배치에서 가치를 만드는 디지털 공급망 관리 사례가 유형의 재화를 다루는 물류 서비스 혁신에 있어 참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박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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