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진상 앰플러스파트너스 대표
‘이미 이뤄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실리콘밸리에 널리 퍼진 문화 중 하나다. 이는 좋게 해석하면, 스타트업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을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해석한다면, 스타트업이 그저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때때로 위와 같은 문화를 지향하지 않는 스타트업이 못 나가거나 능력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스타트업 생태계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최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모 유명 스타트업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글이 퍼진 적 있다. 그런데 그 부조리가 실상은 스타트업 생태계에 만연한 것이라면 어떨까. 스타트업 생태계의 구성원은 그것이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곳 전체가 이미 혼탁한 물이라면, 그리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아니라 고래 한 마리라면 어떨까.
포부가 편법을 정당화할 수 있나
스타트업 창업가나 기업가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루겠다는 허황된 포부를 가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설령 꿈꾸는 미래가 오지 않아 거짓말쟁이 신세가 되더라도, 미래를 이야기해야만 스타트업 창업가라 할 수 있다. 테니스 스타플레이어 로저 페더러의 “영원히 꿈꾸고, 굳게 믿는다”라는 말은 창업가가 숙명적으로 갖춰야만 하는 어떤 자질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훌륭한 창업가라도 허튼 미래를 꿈꾼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창업가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고, 자기 직원과 주변을 악용하고, 쉽게 버리고, 불통하고, 자기 마음대로 조직을 운영하진 않는다. 실리콘밸리에는 훌륭한 창업가가 얼마나 많을까. ‘우버(Uber)’의 직원 인권 무시와 성희롱, ‘테라노스(Theranos)’의 거짓 데이터, ‘햄튼크릭(Hampton Creek Foods Inc.)’의 직원들에 자사 제품 강매 등등.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이 옳지 않은 행동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회사가 무너진 곳도 있다.
VC와 언론도 공범이다
책임은 스타트업에게만 있지 않다. 벤처캐피탈(VC)로 대표되는 스타트업 투자자가 스타트업에게 불법, 허위, 부조리를 강요할 가능성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타트업 투자자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높은 위험을 감수한다. 10개의 투자 중 하나를 빼고 다 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투자자는 모든 피투자기업에게 매우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이를 시장에 설파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투자자의 혁신 강요가 사기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투자자는 스타트업에게 실적에 관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말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스타트업은 근거 데이터도 없이 ‘전년 대비 XX% 성장’이라는 발표 자료를 생산한다. 이 때문에 스타트업의 실적 발표 자료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일은 스타트업 생태계 전체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흥미 위주의 기사 생산에 치중하는 언론도 공범이다. 사기를 부채질 하는 VC와 사실 여부 파악 따윈 관심 없는 언론,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뭐라도 달라 보여야 한다거나 빠른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만나게 되면, 문제가 펑 하고 터진다. 스타트업이 망가지고 구성원이 구렁텅이로 내몰리기 시작한다.
‘윤리’를 고민할 때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스타트업 생태계는 높은 수준의 윤리경영을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곳은 흔히 이타적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창업가가 모여 있다고 여겨진다. 정말 그렇다면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혁신적인 사업모델을 추구하는 테크 스타트업에게 있어 ‘신뢰’는 사람과 돈을 끌어당기는 중요한 요인이다. 생태계에 거는 신뢰가 깨지면 생태계는 급속도로 무너진다.
어떻게 일군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던가. 불합리한 규제와 법에 치열하게 저항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도전은 분명 창업가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목표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는 것은 모두가 지양해야 한다. 몰라서 실수하는 것과 고의로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는 것은 다르다. 보통 이상의 역량을 갖춘 경영자라면, 범법과 편법을 정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인지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스타트업은 성숙한 조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장 가능성도 높고, 세상을 바꾸는 도전도 과감하게 행한다. 기업가치가 조 단위를 넘는 유니콘이 되었다는 것이 성숙한 조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빠른 로켓 성장을 지속하지 못 하면 추락하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성장이 둔화되었을 때 성숙하지 못 한 창업자의 의식수준이 초래할 결과는 비극적이다. 성숙한 조언자, 성숙한 조력자, 성숙한 친구, 성숙한 임직원이 창업가 주변에 많아야 하는 이유다.
양은 무의식중에 실수로라도 늑대의 탈을 쓰지 않는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늑대의 탈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스타트업에게 매우 위험한 유혹이다.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무책임한 감싸기가 생태계 전체를 죽이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빨리 치고 빠져서 떠나면 그만인 이해관계자들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앰플러스파트너스(주) 대표이사 및 인하대 겸임교수. 넥스트벤쳐투자, 삼성전자, 3M, LG전자 등에서 연구개발, 기술마케팅 및 영업, Corporation Venture Capital, Venture Capital 업무 등을 수행하였으며, 창진특(톈진)전자유한공사 등에서 창업 및 사업을 하였다. 구글캠퍼스, 국민대, 서강대, 서울대, 유니스트, 한양대 등에서 기업가정신 및 스타트업 관련 강의 및 교육을 진행하였다. 스타트업 도우미가 되고 싶은 마음에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