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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현의 크로스보더]CBT 사전에 ‘당연함’은 없다

by 조철현

2017년 05월 19일

사전, CBT, 글로벌

글. 조철현 컨설턴트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업자라면 진출하려는 국가의 사정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과 비슷하겠지’, 혹은 ‘이건 당연히 있겠지’라고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이와 관련해 필자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이 하나 있다. C사의 글로벌 사업팀에서 일할 때였다. 필자가 속한 팀은 인도에 쇼핑몰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가 사용하던 홈쇼핑 시스템은 국내의 한 홈쇼핑사가 해외 사업을 위해 커스터마이징해서 만든 패키지 제품으로서, 우리는 그 홈쇼핑 시스템을 인도 현지 사정에 맞춰 수정하기 위한 협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외 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홈쇼핑 시스템은 지극히도 한국 시장에 맞춰져 있었으며, 그것을 인도의 상황에 맞춰 바꾸는 것은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

 

문제는 시스템뿐만이 아니었다. 사업을 추진하던 팀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능력자로 구성돼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다른 나라의 상황을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한 뒤 무언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큰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당연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이 에피소드는 훗날 다른 글로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니, 주민등록번호가 없다고?

 

당연한 일 하나. 한국에서는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는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하게 누리는 혜택을 상당 부분 누리지 못 한다.

 

때문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국내용 시스템, 특히 특정 회사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에는 대개 주민등록번호가 ‘반드시 입력되어야 하는 값’으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요즘에는 개인정보 보호법 등에서 사업자가 주민등록번호를 본인 확인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보유할 수는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필자가 인도 진출을 계획하던 그 때는 이러한 이슈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당연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이 인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즉, 인도에는 국가가 국민의 신분을 입증해주는 신분증 제도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우리가 인도에 도입하고자 했던 시스템이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고객의 성별과 나이, 생년월일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에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시스템에는 주민등록번호 입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급하게 위키피디아를 통해 확인해보니 당시 인도에서는 ID카드(신분증) 파일럿 테스트가 진행 중이었다. 전기, 수도, 휴대전화 SIM카드 등을 사용하기 위해 여권, 배급카드(Ration Card), PAN카드, 운전면허증 등을 통해 신분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우리는 여권, PAN카드,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대체했고, CRM을 위한 정보는 별도로 수집해야 했다.

 

신용카드도, 온라인뱅킹도 없다

 

당연한 사실 둘. 한국에서는 콜센터로 전화주문을 하든,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주문을 하든, 오프라인 매장을 직접 방문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신용카드나 계좌 이체를 이용해 결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인도의 사정은 좀 달랐다. 우리는 여기서도 몇 가지 문제에 부딪쳤다.

 

첫 번째 문제는 대부분의 구매자가 신용카드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온라인쇼핑에서는 신용카드 결제가 7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팀 내의 누구도 구매자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의 경우, 신용카드가 많이 사용되지 않아 VAN사와 PG사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사업이 막 시작되는 걸음마 단계였다. 그 결과 우리는 금융사와 시스템 간의 인터페이스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막 시작한 PG사의 프로세스를 잡아주고, 테스트도 함께 해주어야 했다. 남의 사업을 도와준 꼴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이와 관련된 테스트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 환경에서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 실제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고, 다시 환불을 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테스트에 사용됐던 직원들의 계좌만 비어갔다. 물론 나중에 경비 처리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온라인 뱅킹’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은행창구에서 입출금 거래를 하던 때가 있었다. 이후 ATM과 전화이체가 생겼고, 지금은 인터넷 뱅킹과 모바일 뱅킹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인도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시기와 지금의 사정은 또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는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보다는 ATM을 더 많이 사용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겪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당연한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당연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하게 됐다. 한국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은 한국에서만 유효하다. 비행기와 배를 타고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한다. ‘당연함’의 환상에서 빠져나오자. 그렇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치게 될 수도 있다.



조철현

2000년부터 CJ오쇼핑과 11번가에서 국내외 전자상거래 시스템 구축과 IT전략, 개발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현재는 빅데이터 솔루션인 Splunk의 파트너사 가이온의 프리세일즈팀 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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