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기사는 CLO 통권 63호(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일부 발췌했습니다
그저 내버려두기라도
글. 김도현 국민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who?
김도현
김도현 국민대학교 경영학부교수는 창업과 전략을 공부한 인연으로 스타트업이 바꾸어가는 세상을 관찰하고 있으며, 국민대 창업지원단장과 한국벤처창업학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Idea in Brief
우리나라의 경제는 대기업을 성장 동력 삼아 성장했고, 근면성실과 일사불란을 중요한 노동가치로 삼아왔다. 그러나 대기업은 고전하고 있고,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다시 묻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기업들은 직원들의 최저연봉을 7만 달러로 인상하고 그에 맞춰 CEO의 연봉까지 90% 삭감한 ‘그래비티 페이먼트’ 의 사례처럼 극변하는 환경에 맞춰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우면 적어도 스타트업을 ‘나부랭이’ 로 치부하지 않는 것, 그것마저도 어려우면 그저 ‘내버려두기’라도 하는 것. 그것이 스타트업을 키우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쟁 가능성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뉴스를 잠식하던 지난 8월 20일과 21일, 제주도에서는 ‘스타트업생태계 컨퍼런스’라는 이름의 흥미로운 모임이 열렸습니다.
우리나라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 가운데 ‘스타트업이 아닌’ 대표적인 기관들이 함께 모여보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게 활동하는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 임정욱 센터장이 주도한 작품입니다. 액셀러레이터, VC, 정부 각 부처, 대학, 그리고 기업과 재단 등의 민간 스타트업 지원기구에서 온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솔직한 의견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대가 없는 자발적인 참석이었습니다. 이는 실리콘밸리, 서울,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데다가 서로 배경도 다른 다양한 이들이 모였는데도 참가자 모두가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 지표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두려운 전망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스타트업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스타트업 육성에서 전 세계적인 경쟁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스타트업 열풍이 런던과 텔아비브에 부는가 싶더니 베를린, 파리, 싱가폴을 거쳐 우리 이웃인 베이징과 상하이, 센젠(심천)에서는 거대한 태풍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스타트업에게 인재를 계속 빼앗기고 있으며, 뛰어난 인재들이 소수의 스타트업 집적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상도 분명합니다. 베를린과 센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흐름에 맞서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 지 여러 논의가 오갔고,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개방과 공유, 그리고 투명성이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SI업체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픈소스를 사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고, 개발과정에서 기존에 개발된 코드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만든 코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려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필요하고 자신도 다른 이의 창작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신뢰도 함께 필요할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공 SI프로젝트가 발주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풍경입니다.
또,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는 한 벤처캐피탈리스트는 “우리나라만 혼자 hwp(한글워드파일)라는 ‘신기한’ 파일 포맷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이상하다” 는 의견을 냈습니다. 세계 표준과 동떨어진 hwp문서로 쌓여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서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접근을 크게 제한하고 있고, 공동작업에도 큰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hwp라는 문서형식을 반드시 사용해야만 한다는 규칙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관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한 스타트업이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을 소개하는 자료를 샤오미에 보냈더니 레이쥔과 만나게 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무 실적이 없는 외국의 스타트업이 삼성이나 현대자동차에 연락을 취해서 소위 ‘오너’ 와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거꾸로 대기업에서 일하는 어떤 분은 어떤 외국의 스타트업에게 만나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모든 작은 기업을 잠재적 하청업체라고 생각하는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작은 기업이 자신들의 미팅제의를 거절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 외국의 스타트업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데 바빠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메일에 썼답니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서로의 필요에 따라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다는 매우 당연한 생각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상식이 아닙니다. 국내최초로 엑설러레이터를 만든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는 최근 펴낸 책에서 “스타트업들이 섣불리 대기업과 협력하지 않는 것” 이 낫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한 대기업들이 아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입니다.
정부지원의 지속성에 대한 우려도 많았습니다. 최근 몇 년간 스타트업들의 큰 성장은 정부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 새 정부가 이전 정부의 정책을 뒤집어버리는 것이 관습화된 현실에서 과연 창업지원정책이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염려가 적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 공감했던 것은 우리사회가 조금 더 스타트업 친화적이면 좋겠다는 것 이었습니다. 좀 막연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게 핵심이라고 느낀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비티 페이먼트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 의 CEO 댄 프라이스는 지난 4월 직원들의 최저연봉을 7만 달러로 인상하고, 자신의 연봉역시 90% 깎아서 여기에 맞추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언론은 “주주들은 반발했고, 일부 직원들은 이런 ‘공산주의’ 에 반발해서 댄 프라이스 CEO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는 취지의 뉴스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직원이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며, 좀 힘든 점도 있지만 이런 정책을 다른 회사들도 따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스타트업인 잡플래닛은 지난 6월, 메르스로 인한 불안감이 직원들 사이에 퍼지고 자녀들 학교의 휴업으로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나오자, 전 직원의 재택근무를 결정했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반가워했고, 생산성은 오히려 올랐다고 합니다. 이들 스타트업들은 “다른 기업이 어떻게 행동할까?”, “남들이 뭐라고 할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맞선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나름의 창의적인 방법으로 풀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대기업을 성장 동력 삼아 성장했고, 근면성실과 일사불란을 중요한 노동가치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은 고전하고 있고,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다시 묻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에 따라 연봉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연봉이 성과를 만들지는 않는지 실험할 수도 있고, 근면성실 대신 잉여를 높이 평가해 볼 수도 있습니다. 회의에서 조직원들이 리더의 말을 받아 적는 대신, 조직원들은 말하고 리더가 받아 적도록 하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얼빠진 공산주의자라 매도하는 대신, 그들을 ‘을 나부랭이’ 라고 부르는 대신, 재미있게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사회. 적어도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공무원시험보라고 호통치지 않는 사회. 아니 그게 어려우면 그저 내버려두기만이라도 하는 사회. 그게 스타트업을 키우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