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가트너 코드? 가트너 SCM Ranking에 숨겨진 ‘성장의 비밀코드’

by 설창민

2020년 04월 22일

글. 설창민 SCM 칼럼니스트

 

부(富)는 개방성을 따라간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역사를 보면, 혁신과 개방성을 억압하는 국가의 부가 혁신과 개방성을 환영하는 국가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강대국이 탄생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아래 그 증거들을 확인해보자.

 

아랍 지역과 자유롭게 무역을 하던 아말피, 피사,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항구도시들은 영주의 폭압으로부터 탈출한 농노들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 장사를 해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부를 통해 이탈리아 항구도시들은 십자군 원정을 좌우할 정도의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며, 결국 중세 유럽이 르네상스 시대로 이행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랍 세력이 우세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왕세자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함으로써 연합 왕국을 결성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사벨 1세에게 이탈리아 출신 항해사 하나가 나타나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고, 이탈리아가 독점하고 있던 동방 무역을 연합 왕국이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므로 자신을 후원해 달라고 간청한다.

▲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왼쪽)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오른쪽)

 

이 사내는 이미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에 가서 후원을 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한 터였다. 당시로서는 절대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일까, 이사벨 1세는 자신이 아끼던 보석을 팔고 심지어 자신의 왕관마저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아 마련한 돈으로 이 사내를 후원한다. 그리고 이 사내,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1492년 8월 3일 이베리아 반도 남부 카디스 항을 출항하여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에 상륙함으로써 신대륙을 발견한다. 이후 두 왕국은 스페인 왕국으로 사실상 통일되었고,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유럽 역사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반면 무역으로 번성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자연스럽게 쇠퇴한다.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1862, 디오스코로 푸에블라)

 

스페인이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유럽 최강대국으로 군림할 때쯤, 유럽은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가톨릭을 버리고 성공회, 즉 신교로 갈아타면서 종교 갈등을 정리한 영국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스페인의 표적이 되었다. 스페인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영국을 침공했으나 영국은 근접전을 피하고 대포 공격 후 빠르게 퇴각하는 혁신적인 작전과 화공이라는 아이디어로 스페인 함대를 격퇴한다.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쌓은 부를 종교 사수라는 명분을 위해 쏟아 부은 스페인은 얼마 안 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일찌감치 종교 갈등을 정리했던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독실한 가톨릭교도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신교도, 특히 근면과 절제를 강조하던 청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탄압을 이기지 못한 청교도 일부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오늘날 미국의 토대가 되었고, 다른 일부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로 건너가 무역 및 식민지 개척의 중추 역할을 담당해 이른바 네덜란드 황금의 17세기를 이끌게 된다. 반면 영국은 명예혁명과 하노버 왕조의 시작으로 본격적인 민주화의 길에 들어서기 전까지 피비린내 나는 왕당파와 국회파의 정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 스위스 시계의 시작은 신앙의 자유를 위한 망명이었다.

 

프랑스 또한 종교적 통일성을 지키기 위해 바르톨로메우스의 밤 사건을 일으키는 등 신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앙리 4세는 이른바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듯 했으나, 이후 태양왕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번복함으로써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을 잃은 위그노들은 스위스와 독일 등 인근 국가로 이동한다. 스위스로 건너간 이들은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가르침에 따라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예배 시간을 지켜야만 했다. 장 칼뱅은 사치를 엄격히 금했지만 규칙적 생활과 예배 시간 엄수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시계만큼은 화려해도 좋다고 권장했고, 그 결과 스위스 장인들은 호화로운 시계를 만들기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품인 스위스 시계의 토대를 만들었다. 한편 독일로 건너간 신교도들이 프로이센에서 공업을 일으키면서 후일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되는 계기를 만든다.

 

조지프 슘페터의 세기

 

이렇듯 부는 과거의 명분에 갇혀 혁신적 아이디어를 거부하는 폐쇄된 사회를 떠나 능력 있는 인물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우대해 주는 개방된 사회로 이동했고, 이동한 부에 따라 경제는 불황과 호황을 오고 갔다. 전 대통령 재임기에 미국 국가경제회(National Economic Council) 위원장을 지냈으며, 27대 하버드 대학교 총장을 지낸 로런스 헨리 서머스(Lawrence Henry Summers) 하버드대 교수는 2009년 백악관 발표문을 통해 '21세기는 아담 스미스도, 존 메이나드 케인즈도 아닌 조지프 슘페터의 세기'라고 밝힌 바 있다. 현대의 경제 불황을 극복하는 답은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 시장경제와 자유 무역, 케인즈의 정부 역할 확대와 거시경제 조율이 아니라 조지프 슘페터가 주장한 창조적 혁신과 앙트레프레너 정신에 있다고 본 셈이다.

▲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을 본 슘페터는 왜 불황이 생기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불황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으며, 오직 혁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라고 결론 내렸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자연스레 회의적 시각 또한 발생하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시각이 창조적 파괴를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했다. 이 같은 이유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해 진화한다고 예측한 것이다.

 

사회주의라고 하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실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적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운영하자는 생각이지 흔히 생각하는 공산주의의 개념은 아니다. 민주적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운영하다 보면 결국 다수의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게 함으로써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 대공황 당시 거리에 줄지어 선 실업자들

 

따지고 보면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만큼 공급한다는 공급망 관리가 슘페터가 본 불황을 극복하는 방법의 본질이었던 셈이다. 1인 가구를 위한 HMR(Home Meal Replacement)이 발달하고, 장 볼 시간이 없는 맞벌이 부부를 위한 새벽배송이 활발하며, 스스로가 사용에 불편을 겪었던 요가 레깅스를 직접 제작해 기업을 일군 사례들을 보면 슘페터의 예측은 상당히 정확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2018년 기준 유럽 SCM Top15 기업 가운데 9개 기업이 과거 유럽 역사의 중심에서 혁신적 생각을 존중해 주고 받아들여준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과 같은 국가 기업들이다. 나머지 6개 중에는 창의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교육 환경을 구축한 스웨덴과 핀란드의 기업들도 섞여 있다. 어떻게 보면 가트너 SCM Top25는 단순히 기업 간의 SCM 능력 순위를 표현한 자료가 아닌, 근대사를 좌우해 왔던 혁신가와 혁신가가 이끄는 기업,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대한 향수의 산물이다. 즉 가트너 SCM Top 25는 현재 어떤 국가가 가장 열심히 혁신하고 있으며, 혁신을 장려하고 지원하고 있는지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 스웨덴의 공교육은 창의력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혁신은 개방성을 따라, 개방성은 제도를 통해

 

혁신을 중시하며 받아들일 줄 아는 사회. 이는 곧 ‘제도가 정비된 사회’를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했듯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종교는 가톨릭이어야 한다는 제도를 고수했던 국가는 쇠퇴했고, 세금을 충실하게 납부한다면 종교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개방적 제도를 고수했던 국가는 번영했다.

 

암스테르담 구 시가에 꽉 들어차 있는 폭 좁은 건물들은 장사로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 건물 폭에 따라 세금을 매기던 확고한 세금 제도가 만든 결과다. 사회 제도가 구성원들에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되 반드시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면, 앙트레프레너(Entrepreneur)는 축적한 부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가져가되 이를 가능케 한 사회에 환원한다. 그러나 사회 제도가 단지 선례가 없다는 핑계로 별다른 기준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압박을 가하고, 지속적으로 활동을 제약한다면 앙트레프레너를 가장한 장사꾼들은 제도의 허점을 노려 마음껏 부를 추구한 뒤 이른바 ‘먹튀’를 한다.

 

2019년의 마지막 CLO M과 함께 지난 1년을 정리하며 내년 계획을 세우며 다시금 사회의 기준과 제도에 대해 고민해봤으면 한다. 가트너 SCM 순위권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혁신을 향한 기업과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지도층을 구성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쩌면 혁신을 그저 앙트레프레너 개인의 역량에만 기대 오지는 않았을까? 시대의 흐름을 읽고, 모순점을 찾아 새로운 기준을 세우려는 의지와 힘을 가진 이들이 점점 혁신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슘페터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진화는 일종의 파괴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 우버와 경쟁을 치루고 있는 뉴욕의 택시브랜드 ‘옐로우캡’

 

희망을 갖자. 선진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기업은 전통적인 혁신에 한계를 느끼고 있고 사회는 공유경제와 전통경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한 외국계 글로벌 기업 지사에서는 비용절감 목표를 전년 대비 %로 제시하는 것이 아닌, 황당하게 정액으로 내놓기도 한다. 무식하게 비용 절감하는 행위는 글로벌 기업도 똑같다. 택시도 마찬가지다. 타다와 택시기사 간의 갈등 구조는 사실상 미국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뉴욕 옐로우캡(Yellow Cab)의 택시면허 시세는 한때 100만 달러(한화 약 12억 원)에 달했지만 지금은 크게 떨어진 상태다.

▲ 면허 없이 사실상 택시 영업을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타다’

 

우버와 택시의 대립은 미국에서도 첨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버와 옐로우캡은 여전히 경쟁하고 있는 반면, 국내 대다수의 승차공유 서비스는 운영을 종료하거나, 운영방식을 강제로 바꾸거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사용자 중심 관점에서 서로간의 장단점을 수용하거나, 제도적 보완 방법을 찾지 않고 아예 협의의 싹을 잘라 버린다. 혁신 국가냐, 아니냐의 차이는 여기서 나온다. 새해를 맞이하며 앞으로 성장과 혁신을 꿈꾸는 이들이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며 우리 사회와 상호작용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설창민

군 복무 전 우연히 하게 된 창고 알바를 계기로 물류에 입문, 아직 초심을 안 버리고 물류하고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해서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cscully)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실무 경험으로 물류업계 종사자들의 삶과 애환을 독특한 시각과 필체로 써내려가는 것이 삶의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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