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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2. 그날 새벽, 나는 왜 ‘레이저 제모기’ 후기를 찾고 있었나

by 신승윤 기자

2019년 07월 19일

 

“야, 근데 내가 다리털이 좀 많은 편인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온갖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적당히 친한 친구이면서, 되도록 여자사람친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낫다. 무심결에 고향의 동성 친구들에게 물었다가는 일주일 뒤 전혀 엉뚱한 곳에서 ‘레이저로 매일 다리를 지지고 있다’는, 나도 몰랐던 내 근황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내 다리털 질문을 왜 하려했었지? 자정이 넘은 시간, 침대에 퍼질러진 몸을 반대 방향으로 틀어본다. 물론 인스타그램을 살피던 스마트폰은 그대로 쥔 채.

 

내 명의로 된 인스타그램에는 게시물이랄 게 딱히 없다. 다만 서너 달 전에 생성한 차명 계정은 팔로잉 수가 상당하다. 내가 좋아하는 전 세계 뮤지션들과 축구 구단 및 선수, 각국 국립공원,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을 팔로잉 해놓고 있다. 익명으로 발 빠른 소식들을 모으는, 일명 ‘덕질 계정’을 별도로 가지고 활동 중이다. 그러니까 그날 밤도 어두컴컴한 방에 자려 누워 덕질에 빠져 있다가, 스크롤 내리랴 하트 누르랴 한참 바쁜 오른손 엄지 사이로 슥 하고 지나가는 그 광고를 나는 보고야 만 것이었다.

 

‘관리하는 남자의 여름철 필수품, 가정용 레이저 제모기’

 

이게 뭐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영상은 시작되었고 나는 멀뚱히 그 빠르게 번쩍거리는 화면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웬 남자가 튀어나와 날이 잘 안 드는 면도기를 집어던지고, 비싼 면도날 가격을 보며 한숨 쉰다. 주변 여자들은 반바지 아래 그의 무성한 다리털을 보며 극혐이란 표정을 짓고, 남자는 고통스럽게 핀셋으로 하나씩 다리털을 뽑으며 괴로워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튀어나온 (누가 봐도 아이돌 연습생 같은)미소년이 손바닥만 한 제모기를 턱과 다리에 대고 몇 번 번쩍번쩍, 말끔해진 우유빛깔 턱을 쓰다듬는다. 그러자 여자들이 우르르 그를 쫓는다. 이 모든 일이 30초 만에 일어났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더 어이없는 것은 ‘지금 구매하러 가기’ 버튼을 누르며 다음 화면이 뜨기까지 내 머릿속을 스쳐간 수많은 생각들이다. 찰나의 시간, 나는 ‘맞아, 나도 면도기가 잘 안 들고 날도 비싸서 짜증나는데’, ‘턱이나 인중 주변이 푸르스름한 것도 뭔가 맘에 안 들어’, ‘근데 내가 다리털도 좀 많은 편인가? 좀 보기 싫은 걸까?’라고 생각하며, 단돈 16만 원의 가정용 레이저 제모기 후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친구에게 내 다리털을 평가해달라는 카톡을 쓰고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누인 몸을 반대 방향으로 뒤척이며 잠깐 사고란 것을 다시 시작해보니, 애초에 나는 내 몸에 나는 털에 대해 머리털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눈썹 관리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군대 동기를 통해 처음 알게 되고서는 ‘저게 뭔 짓거리여’라고 생각한 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살던 내가 갑자기 다리털 레이저 제모라니. 인스타그램이 내게 있지도 않은 걱정거리를 심어주고, 한두 시간이면 사라져버릴 유용함을 쫓게 했으며,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떤 아저씨의 다리와 내 다리를 30분 넘게 비교하게 만들었구나. 아, 허탈하도다!

 

그렇게 얼른 뒤로 가기를 빠르게 연타한 나는 원래 내가 있던 덕질의 세계로 돌아왔다. 허나 무언가 냄새를 맡은 것일까. 그 뒤로도 인스타그램은 한참동안이나 왁싱과 태닝 용품, 남성용 화장품 등 ‘관리하는 남자의 필수품’들을 내 피드에다 던져 놓았으나,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콤버바인’에서 마릴린 맨슨 형님은 말씀하셨다. “공포심을 이용한 광고, 그것이 우리 경제의 기초다. 겁을 잔뜩 줘서 소비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나는 더 이상 내 다리털과 푸르스름한 수염에 대해 걱정하기를 멈췄다. 그저 평온히 잠이 들 때까지, 오직 나의 취향대로 덕질을 이어가리라. 아니, 근데 뭐야. 이게 왜 반값이야?

 

아무래도 피곤한 심신에 자려고 누운 것인데. 밝은 스마트폰 화면에 그만 잠이 깨버린 것인지, 오히려 더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인지. 몇 번을 허우적거리다 어느새 그러려니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나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다.



신승윤 기자


'물류'라는 연결고리 / 제보 : ssym232@clo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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