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자판기는↓, 꽃·화장품·샐러드 파는 특수자판기는↑
샐러드 자판기의 과제, 품질 관리와 수요 예측
올해 들어 ‘무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나 3D스캐닝, 센서 기술 등 첨단 기술을 통해 구현되는 무인상점은 기술 집대성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최저시급 인상과 맞물려 특히 소매유통업체의 관심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편의점 업계다. 세븐일레븐이 지난해 5월 잠실 롯데월드타워 31층에 최초로 무인 편의점 ‘세븐일레븐 시그니처’를 열었다. 뒤를 이어 이마트24가 서울지역의 일부 편의점을 무인으로 운영하는 실험에 나섰다. CU는 스마트앱을 통해 고객이 스스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론칭했다. GS25는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를 도입해 근무자의 업무를 도와주는 방식을 내세웠다.
물론 현재의 ‘무인매장’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세븐일레븐, 이마트24, CU의 모두 손님이 직접 스캐너에 물건을 올려놓거나 바코드를 찍어야 하는데, 결국 기존 직원이 하던 결제 작업을 손님이 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런 와중에 새삼 주목받는 또 다른 무인화 방안이 있으니 ‘자동판매기(자판기)’다. 당장 큰 자본이나 첨단 기술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유통비와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이다.
사라지는 자판기
자판기는 예전부터 있었고, 국내 자판기의 절대적인 대수는 감소하는 추세다. 1977년 롯데산업이 일본 샤프社로부터 커피 자판기를 수입해 국내 보급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자판기 수는 꾸준히 늘어났지만, 2000년대를 기점으로 자판기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에 따르면, 2003년 12만 개 정도였던 국내 자동판매기 사업소는 2014년 4만 개 수준으로 떨어졌다. 가장 큰 원인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과 편의점이 급격히 늘어난 데에 있다.
여기에 지난 1월, 식약처가 모든 학교에서 커피 등 고카페인 함유 식품 판매를 금지하는 내용의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일부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자판기의 대명사 ‘커피 자판기’마저 더 많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개정안은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 절차를 거쳐 이르면 오는 7월부터 시행될 전망이다.
진화하는 자판기, 파는 품목도 다양하게
그러나 커피나 캔음료 이외에 상품을 파는 이색 자판기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인건비를 줄이는 것 외에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선보일 수 있는 하나의 유통채널로서의 수요가 나타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판기 기술 역시 발전했고, 동시에 자판기의 생산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한 대당 가격도 낮아졌다. 중국산 자판기 가격은 국내 모델의 60~70% 수준으로 파악된다.
특수 자판기 전문 제조업체 미래자판기연구소 이영환 대표는 “실제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되던 작년부터 자판기 제작 문의가 늘었다”며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꽃 자판기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롯데기공 같은 대형 자판기 제조업체의 경우, 수지타산의 이유로 최소 몇 백대 단위의 주문이 필요한데, 특수 자판기는 그보다 적은 대수의 주문이 일반적이다”고 덧붙였다.
음료 자판기처럼 단순한 기능을 넘어 이제는 자판기에 터치스크린 적용이 가능하고, 카메라를 달아 자판기 밖의 상황을 볼 수도 있다. 휴대폰으로 자판기의 상품 판매 현황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쌍방향 통신을 통한 중앙 관제도 가능하다.
이 대표는 “자판기는 아주 작은 매장이나 상가와 같다”며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한다는 맥락에서 무인시스템을 본다면, 자판기는 그 안에서 한 축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전했다.
새로운 판매 채널과 홍보의 수단으로 자판기가 각광을 받으면서 상품군도 다양해졌다.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 화장품 편집숍 시코르는 작년 말부터 매장에 자판기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 역시 작년부터 미국 10개 도시 공항에 의류 자판기 ‘유니클로 투 고(To Go)’를 설치했다. 기존 매장보다 임대료가 적어질 뿐만 아니라, 직원과의 대면을 부담스러워 하는 소비 성향도 반영했다.
자판기에서 샐러드가 나온다
최근에는 식재료, 반찬이나 샐러드 같이 유통기한이 극도로 짧은 상품까지 자판기에서 팔기 시작했다. 샐러드 전문업체 스윗밸런스도 그 중 하나다. 스윗밸런스는 서울에 총 4개의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유통 채널로 자판기를 선택했다. 스윗밸런스는 총 3대의 자판기를 운영 중이다.(1월 말 기준)
자판기 도입 계기는 단순했다. 스윗밸런스가 가장 먼저 자판기를 설치한 곳은 한 헬스장이었다. 이운성 스윗밸런스 공동대표는 “어느 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나오는 중에 상쾌한 상태에서 깔끔한 음식이 먹고 싶었는데 마땅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헬스장에 샐러드 자판기를 넣었는데 실제로도 고객 반응이 있었다”고 전했다.
▲ 스윗밸런스의 샐러드 자판기. 초창기 스윗밸런스의 자판기는 ‘네이키드 샐러드’라는 이름이었는데, 현재는 스윗밸런스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이운성 대표는 “처음에는 새로운 채널로서 자판기를 브랜드화하기 위해 스윗밸런스와 다른 이름을 붙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F&B 분야의 특성 상 제품에 대한 신뢰도의 기준이 브랜드라고 느끼게 됐다. 이에 자판기 역시 스윗밸런스로 통합됐다”고 말했다.(사진= 피트니스FM 페이스북)
스윗밸런스는 샐러드 자판기가 고객이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샐러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대표는 자판기의 본질이 ‘제품’에 있다고 강조했다. 자판기에 들어있는 제품이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이면서, 동시에 소비할만한 제품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스윗밸런스는 오프라인 매장의 메뉴와는 별도로 자판기 판매용 메뉴를 개발했다. 매장의 메뉴가 요리에 가깝다면, 자판기 상품은 비교적 소량이면서 단순하다. 스윗밸런스는 전문 쉐프를 영입해 자사의 샐러드 메뉴를 직접 개발한다.
이운성 대표는 “자판기 상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편의성”이라며 “자판기 커피가 사람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저렴한 가격으로 언제든지 쉽게 뽑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고, 이는 샐러드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현재 스윗밸런스는 별도로 샐러드 생산 공장을 구축해 그곳에서 매장용/자판기용 제품을 생산한다. 생산된 제품은 각 매장과 자판기로 보내진다.
첫 번째 자판기 설치 이후, 스윗밸런스는 상권에 따른 수요를 조사하기 위해 오피스 밀집 지역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자판기를 설치했다. 물론 유동인구가 많다고 해서 항상 샐러드 판매가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운성 대표는 “초반에 63빌딩 옆에 자판기를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유동 인구는 많았지만 반복구매 고객이 적어 실제 샐러드 판매량은 많지 않았다”며 “이후 몇 번의 입지 변경과 제품 품질 향상에 따라 현재는 자판기 3대 모두 비교적 안정적인 구매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따르면 현재 가장 매출이 많이 나오는 자판기의 경우 월 2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헬스장을 제외하고, 현재 스윗밸러스의 자판기는 공유사무실과 대학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설치된 장소가 다른 만큼, 세 자판기의 판매패턴도 조금씩 다르다. 가령 직장인이 많은 공유사무실에 위치한 자판기의 판매량은 월요일이 가장 많고, 주말로 갈수록 판매량이 적어진다.
‘신선한’ 자판기가 풀어야 할 과제
하지만 신선 자판기가 아직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제품의 품질 관리와 수요 예측에 따른 재고 관리 문제를 동시에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 있다. 이제껏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상품은 유통기한이 긴 상품이었다. 커피 자판기나 음료 자판기의 경우, 음료수 캔은 유통기한이 최소 몇 개월 이상이고, 커피 자판기는 커피가 판매될 때마다 세척을 하는 기능이 있어 비교적 관리가 쉽다.
꽃 자판기 역시 마찬가지다. 꽃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꽃다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생화가 아닌 ‘프리저브드’다. 프리저브드는 생화에서 물기를 빼내고 특수 약품을 넣어 모양과 색상이 반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처리한 꽃이다. 일반 드라이플라워의 경우, 자연 상태에서 건조시킨 것으로 만지면 부서질 정도로 약해진다.
반면 프리저보드는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강하다. 생화가 아닌 프리저브드를 판매하는 이유 역시 상품 관리가 쉽고 유통기한이 길어 생화나 드라이플라워보다 상품 손상(Loss)율이 낮기 때문이다. 이영환 대표는 “자판기 판매용이라면 적어도 두 달 이상 자판기 안에 있어도 문제가 없는 제품이 가장 좋다”고 전했다.
▲ 꽃 자판기. 실제로 꽃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는 한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할로윈데이나 발렌타인데이 등 특수기간을 제외했을 때, A급 자리에 위치한 꽃 자판기의 일 판매량은 10~15 다발 정도다.
이에 반해 샐러드 자판기의 경우, 제품 관리가 어렵다. 물론 자판기 문을 냉장고처럼 자주 열지 않기 때문에 온도 유지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여기에서 ‘제품 관리의 어려움’이란 자판기 컨셉에 맞게 저렴하면서도 제품의 품질은 유지하고, 수익까지 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샐러드의 주재료인 과일이나 야채는 원재료의 가격 변동이 심하다. 레시피는 정해져 있는데 원재료 가격이 급격히 높아지면 기본 생산 원가가 높아지고, 수익 구조를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컨셉과 저렴한 가격, 제품 품질, 수익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스윗밸런스의 경우, 주요 원재료를 공급하는 20여 개 농장과 직거래를 통해 재료를 매입한다. 자체 생산 기지를 구축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운성 대표는 “고객이 자판기를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저렴한 가격인데, 생산 공장을 구축하기 전 외주 생산을 맡겼을 때 자판기용 샐러드 판매가가 1만 원 정도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 외에 재고 이슈도 있다. 전기세, 임대료, 관리비, 재료비 등을 제외하면, 보통 자판기의 마진율은 40~50% 정도다. 재료비를 제외하고, 투자비에선 자판기 자체의 가격과 임대료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임대료의 경우, 입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월 10~30만 원 선이다. 여기에서도 마진을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는 샐러드 재고다. 여기에 상품 특성상,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팔 수 없고, 이는 고스란히 비용으로 돌아간다.
스윗밸런스는 이 해답을 ‘선구매’ 모델에서 찾고자 한다. 자판기가 있는 곳 중 하나인 공유 사무실엔 자판기 외에 별도로 냉장고를 두어, 예약주문을 받아 냉장고에 둔다. 동시에 주 단위로 자판기 판매 데이터를 수집해 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판기 판매량을 예측하는 방식이다.
올해 상반기 스윗밸런스는 추가로 6개의 매장을 열어 오프라인 매장 확대에 나선다. 이와 함께 샐러드 자판기 역시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이운성 대표는 “지금까지는 샐러드 자판기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시기였다”며 “현재는 자판기가 샐러드 판매 창구로는 조금 낯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제품을 제공한다면 충분히 사업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제품 관리와 재고 이슈를 포함해 자판기 가격, 부동산 문제 등이 조금씩 해소되면 확장성과 지속가능성이 크게 제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